1·2층 거대한 지도·전시품과 대조
3층 '6평 남짓' 동원 과정 등 공개
"일본인, 강제성 없는 고용 알아"
25℃의 날씨였지만, 갱도 안에 들어서자 10℃까지 주저앉은 차갑고 습한 공기가 엄습했다. 100m 이상 긴 갱도에는 이곳에서 금이 얼마나 발견됐는지와 갱도 관리 및 현대화의 과정, 제련의 방법 등이 자세히 기술된 표지판이 10m마다 설치돼 있다.
1.5㎞로 이어지는 도유갱도 내부 관광코스에서 조선인의 노동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건 오직 '메이지 시대 초기의 운영 체제'라는 제목의 표지판에 적힌 '고용 외국인(Foreign Engineers)' 문구뿐이다.
통로에 설치된 스피커에선 '사도광산은 최첨단 기술과 외국인 기술자가 투입돼 일본 근대화의 선구가 됐다' 등의 성과를 자축하는 방송만 반복해 흘러나왔다.
갱도를 빠져나와 출구 옆 '기계공장전시실'이란 곳에 들어서자, '조선인'이 유일하게 언급된 2가지의 기록이 한쪽 벽면에 기록돼 있다.
'1939년(쇼와14년),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일본으로의 모집을 시작했다', '1945년(쇼와20년 9월) 패전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가 조선으로 돌아갔다'.
일본 측이 공개한 자료엔 '모집'과 '돌아갔다' 등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모습에 자발성이 느껴지는 단어들로 채워졌다.
사도광산을 찾은 일본인 쿠보다(51)씨는 "뉴스에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도쿄에서 4시간 넘게 걸려 이곳에 왔다"면서도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해선 잘 모르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가장 큰 쟁점은 일본이 한국인의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냐는 점이다.
국내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과 역사학계는 일본 정부가 강제노동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등재 결정과 함께 약속한 후속조치들에 대해 지지부진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일본은 사도광산을 메이지시대 산업혁명 유산의 상징으로 남기고, 그 역사를 인정받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몰두했다. 지난 7월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사도광산은 지난 2015년 등재된 군함도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인의 강제동원의 역사가 담긴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사도광산에서 2㎞ 정도 떨어진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을 찾았다. 조선인 노역 역사가 담겨 일본이 권고 이행의 대표적 사례로 내세우는 곳이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자 1층은 거대한 지도와 전시품, 연혁과 사진 등 사도광산 발전에 기여한 내용과 지역 역사로 가득 채워졌다. 1층을 지나 3층까지 이어지는 좁고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한국인 노동자 기록이 있는 전시실이 나온다.
6평 남짓의 전시실엔 유일한 유물인 갱도에서 발견된 조그마한 나무 도시락통과 관련 기록이 전시돼 있다. 연도별로 조선인 노동자의 이력이 정리된 패널엔 이렇게 적혀 있다.
"1938년 4월에 공포됐고 동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이 이듬해 7월에 시행됐다. 1939년 9월에 '모집'이, 1942년 2월에 '관 알선'이, 1944년 9월에 '징용'이 한반도에 도입됐다. '모집'은 민간 고용자의 책임하에 일본이 조선반도에 설치한 행정기구인 조선총독부의 인허가를 받은 뒤에 노동자를 채용하는 구조다…"
이처럼 박물관엔 노동자들의 동원 과정 등이 공개되며 일본이 조선인 동원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려 부분적으로 노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강제'라는 명시적 표현이 누락된 걸 두고 국내와 해석이 엇갈리며 논란은 이어지는 상황이다.
일본 오사카에 30년 이상 거주 중이며 이날 사도광산을 찾은 김창현(가명·66)씨는 "일본 현지에선 사실 한국인 강제동원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적고, 한국에서 이같이 논쟁이 큰 사안이라는 것도 잘 모르는 상황"이라며 "특히 강제성 없이 임금을 지급한 고용이라고 알고 있는 일본인도 많다. 이미 문화유산 등재는 됐지만, 한일 양국의 발전을 위해 역사 논쟁이 마무리될 합의점이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본 니가타현/고건기자 gogosi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