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자본 결집한 경제 선각자.’ 경인일보가 발간한 ‘인천인물 100人(2009)’이 서상집(徐相集·1854~1912)을 함축한 한 줄 제목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 후 1883년 개항한 인천은 중국·일본·독일·영국 등 열강의 상업 세력이 집결한 각축장이었다. 이들은 면세 특권을 이용해 신식 일용품을 마구 들여왔다.

인천 상인들은 외국자본에 대항하려 1885년 ‘인천객주회’를 조직했지만, 근대 상인단체의 면모는 갖추지 못했다. 1896년 서상집이 주도해 서상빈, 박명규 등이 ‘인천항신상협회’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상인단체다. 협회는 일본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대항해 민족상권을 옹호했다. 일본상인의 비위행위를 규탄하고 정부에 일본상인들로 인한 상권 침탈 피해를 호소하고 시정을 촉구했다. 상인들의 단결은 물론 상업 자세의 혁신 등 계몽에도 힘썼다. 협회는 1905년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로 계승됐고, 오늘날 인천상공회의소로 이어진다.

서상집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 인천지점의 지배인으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 지금의 시장 격인 인천감리 겸 인천부윤을 지냈다. 해운과 무역사업에도 손을 대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898년 호적표를 보면 그의 나이 45세에 무려 74칸의 가옥을 소유했다. 왕족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다. 최성연이 쓴 ‘개항과 양관 역정(1959)’에 따르면 서상집의 자녀는 ‘언제나 뉴우·스타일의 양복을 쪽쪽 빼고 다녔으며 신기한 소지품이 많았고 또 멋진 오토바이를 몰고 으스대던 모던·뽀이’였다. 그의 부를 짐작게 하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반면에 일본거류지에 토지 5천630평을 기부하고, 유길준의 새 정부 수립 계획을 밀고했다는 정황은 삶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경제 선각자’ 서상집의 유골함이 갈 곳을 잃었단다. 유해가 안치된 민간 납골당이 소유권 문제로 폐쇄됐기 때문이다. 5년 전 파묘된 데 이어 또다시 벌어진 기막힌 일이다. 증손녀가 부랴부랴 수습해 유골함을 자택으로 모신 상태다. 안타까운 소식에 학계를 중심으로 추모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가 운영하는 인천가족공원에 안치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다. 서상집은 근대 경제사의 비조(鼻祖)다. 인천 대표인물로서 역사적 가치를 연구하고, 유골함도 예우해야 마땅하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