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눈’을 제목으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지었다. 정호승은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태주는 “늙은 아내의 말이 첫눈이다/ 그녀의 마음이 첫눈”이라 했다. 첫눈 핑계로 친구와 소주 한잔 걸치고 들어온 시인에게 아내가 건넨 말이 “나, 당신 걱정하는 거/ 당신도 알지요”다. 이해인의 첫눈은 “나의 첫사랑이신 당신께/ 첫 마음으로 가겠습니다”라는 서원이다. 소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도착한 설국에서 고마코와 요코를 만났듯, 시인들은 첫눈을 통해 순수감정의 원형을 마주하는가 보다. 보통 사람들의 감성도 이와 같을 테다.
올해 첫눈이 폭설로 왔다. 27일 내린 눈으로 전국이 설국이 됐다. 특히 수도권에서 출근 시간에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쏟아진 눈이 하루 종일 이어지면서 11월 적설량으론 기상관측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북극의 찬 공기를 머금은 절리저기압이 따뜻한 서해를 지나면서 형성한 눈구름이 수도권에 눈폭탄을 뿌렸단다.
폭설로 찾아온 첫눈이니, 낭만은커녕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수도권 시민들은 출근 지옥에 갇혔고, 도로 곳곳에서 추돌사고가 잇따랐다. 인천 출발 항로가 전면 통제되면서 서해 섬들이 고립됐다. 배달앱들이 배달망을 셧다운하자 음식점들은 장사를 공쳤다. 기상청이 머쓱해졌다. 강설 예보는 했지만 폭설 경고는 없었다. ‘역대급 혹한’을 경고했던 장기예보를 ‘따뜻한 겨울’로 수정한 게 며칠 전이다. 인간의 관측 범위 밖에서 급변하는 이상기후의 징조가 두렵다.
세계 경제에도 눈구름이 잔뜩 덮였다. 트럼프가 취임 즉시 관세폭탄을 투하하겠다고 공언했다. 미국 중심의 보호주의 무역 선언이다. 미국 투자 기업에 대한 세제지원 폐지·축소 의지도 강력하다. 대미 수출 관세를 피해 캐나다, 멕시코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철퇴를 맞는다. 미국에 진출한 삼성, SK는 세제지원이 없으면 경쟁력을 잃는다. 세계가 관세 전쟁에 휘말리면 수출이 전부인 우리 경제엔 폭설이 내린다.
예고가 아니라 예정된 경제 폭설이다. 그 눈 다 맞으면 경제가 무너진다. 대비가 없다. 정부와 국회는 손을 놓았고, 기업들의 자구책은 부실한데,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나선다. 첫눈의 낭만 대신 아우성만 남긴 11월 폭설이다. 하지만 정작 큰 눈은 아직 오지 않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