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개항기 역사의 한가운데에 인천항(제물포)이 있었다. 인천항은 1883년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을 맞았다. 한성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배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넓은 갯벌 때문에 배들이 항구에 닿기 힘들었다. 밀물 때조차 정박하기 어렵자 큰 증기선들은 가까운 월미도에 닻을 내렸다. 인천항의 체선·체화 현상을 해결할 방법은 갑문(閘門)이었다.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갑문이 생겼다. 물길을 막아 바닷물의 수위를 높게 유지하자 4천500t급까지 접안하게 됐다.
광복 후 서해 물류 거점으로 성장하던 인천항은 1974년 현대식 갑문을 준공하기에 이른다. 갑문은 폭 36m·높이 18.5m, 갑거 길이는 300m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롤링게이트 등 현대화 장비를 갖췄지만, 막상 갑문에 처음 배를 통과시킬 도선사를 찾는 데는 애를 먹었다. 영예로운 기회였지만 사고가 나면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임무였기 때문이다. 일본 도선사를 데려오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이때 대한민국 1호 국가공인(1958) 도선사 배순태(1925~2017)가 배짱 좋게 나섰다. ‘인천항 갑문 첫 입항 도선사’의 영광을 외국인에 빼앗기는 건 국가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다. 배순태는 ‘여수호’ 시험 도선을 성공한데 이어,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구소련선수단 선박을 도선하고 인천시의 최종 성화봉송 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에 가면 1953년 배순태가 동해호를 타고 미국에 입항했을 때 게양했던 태극기를 볼 수 있다. 그는 한국인 최초 세계일주 선장 기록도 가지고 있다. 유족은 도선수첩·도선운영 연구철 등 고인이 아끼던 유품 171건 195점을 기증했다. 박물관은 동해호 태극기를 ‘12월의 유물’로 선정했다. 또 개관기념 기증특별전을 내년 3월 말까지 개최해 업적을 기린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은 이달 11일 개관했다. 정부가 월미도에 1천16억원을 들여 지상 4층 규모로 지었다. 부산에 12년 전 문 연 박물관이 인천에는 지금껏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늦었지만 인구 300만 대표 해양도시 인천의 새 랜드마크가 탄생했다. 오늘 열릴 ‘해양문화와 지속가능성’ 개관기념 학술대회가 비전의 등대가 될지 주목된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이 바다의 지혜를 담아 순항하기를 기대한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