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격변기는 기인들의 기행으로 얼룩지기 쉽다. 떠돌이 수도승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을 얻어 황실의 권력을 전횡했다. 황제 부부는 황태자의 혈우병을 치료해 준 근본 없는 괴승(怪僧)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가 혁명을 자초해 멸문당했다. 고려 말 공민왕도 승려 신돈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정사와 야사에 과정이 없으니 기록하기에 황당했던 사유라 짐작할 뿐이다. 개혁을 빙자해 전권을 차지한 신돈이 음행과 만행으로 실각한 뒤 공민왕도 시해되고, 왕조는 문을 닫았다.
전근대의 사례가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시대의 정변마다 사이비 종교와 무속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각별했다. 모친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뒤 인연을 맺어 부친 사후에도 의지했던 사람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엔 그의 딸 최서원(최순실)을 믿고 의지하다 탄핵당했다. 부녀가 대를 이어 박근혜의 비선 실세로 군림한 배경으로 주술, 무속,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온갖 풍문과 괴담이 난무했다.
탄핵심판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 주변도 무속 스캔들로 어지럽다. 집권 전과 직후엔 무속인 건진법사와 역술인 천공이 비선 실세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대통령의 왕(王) 자 손바닥, 용산 대통령실 이전 개입설로 대선과 정권 초반이 시끄러웠다. 올해 9월엔 대통령 부부의 국민의힘 공천 개입설이 터지면서 명태균씨가 황금폰으로 무장하고 등장했다. 창원의 무명 책사가 대통령의 육성을 흘리며 정권의 비선 실세였음을 뻐긴다. 건희도사로 회자되는 영부인과 대통령이 무속 프레임에 갇혔다.
박 전 대통령이나 윤 대통령 모두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아버지의 후광과 역린의 기개로 정권을 잡았다. 기사회생의 인생역전을 참언(讖言·앞일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말)으로 왜곡하고 아첨하는 자들에게 홀렸을 법 하다. 그런데 이들에게 휘둘릴 정도였다면 왕조시대 기준으로는 왕기(王氣)가 없었거나 왕기(王器)가 아닌 것이고, 현대의 기준으로는 민주주의 소양 부족의 증거일 테다.
천공이 최근 “윤 대통령은 지금 실패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단다. 이단 시비가 있는 극우 목사는 광장에서 탄핵반대를 주도한다. 시대착오이고 민심 역행이다. 윤 대통령 부부가 감당하면 될 일이다. 보수정당 국민의힘은 전근대적 도참과 결별하고 동시대 민주주의에 복귀해야 한다. 민주자유 보수국민이 수치를 당할 이유가 없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