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로는 바람이 불고 때로는 눈보라가 쳐도 산천의 초목은 힘차게 솟아오를 봄소식을 준비합니다.” 불교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의 신년 법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순택 주교도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우리 사회가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신년 메시지를 밝혔다.
2025년 새해가 열렸지만 나라의 기운과 국민의 기세는 풀이 죽었다. 지난해 꼬리에 매달린 그림자가 넓고 짙은 까닭이다. 황당한 비상계엄이 바람처럼 눈보라처럼 나라와 국민을 할퀴었다. 대통령과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차례로 탄핵됐다. 여야는 탄핵 이후의 대선 정국에 매몰돼 국정 관리를 외면한다. 계엄으로 비참해진 민심은 무안공항 참사로 비탄에 잠겼다. 종정의 봄소식과 대주교의 평화로운 공동체가 간절하건만, 비참한 현실이 너무 강렬하다.
그래도 우리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봄 같은 희망의 의지를 되새길 수 있다. 36년 식민지였던 나라와 민족이 말과 글을 지켜낸 채 해방을 맞았다. 6·25 전쟁으로 낙동강 한 귀퉁이로 내몰린 대한민국은 용케 국가를 지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가 30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기적의 역사를 썼다. 1997년 경제 위기 때는 30대 대기업 중 10여개가 도산했지만, 세계 경제사에 유례없는 금모으기 국난극복 운동으로 3년8개월 만에 IMF를 졸업했다.
해방 이후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제질서의 오묘한 개입과 나라를 위한 국민의 헌신이 절묘하게 조응해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사악한 기운이 대한민국을 덮칠 때마다 바르게 정화시키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척사위정(斥邪衛正), 벽사위정(闢邪衛正)의 기운이 작동했다. ‘하나님의 보우’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는 국민으로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라는 애국가의 염원대로다.
비상계엄 정변, 단장(斷腸)의 참사에 지친 국민에게 펼쳐질 새해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다. 그래도 현대사의 구절양장을 생각하면 이 또한 대한민국이 새롭게 정의로워질 파사현정의 징조들이지 싶다. 비상계엄이 초래한 파국은 국민 수준에 한참 모자라는 정치를 일거에 혁파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파사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현정의 결실은 봄이고 희망일 테다. 2025년, 파사로 시작해 현정으로 끝나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