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원 前 사령관 수첩서 발견된 섬뜩한 메모
서해5도 주민·장병 생명 볼모 공작 시도 의혹
계엄 시나리오 단정 이르지만 실체 밝혀져야
국론 분열되고 사회는 혼란… 모든 것이 위기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오만과 독선에 빠진 무능한 권력은 몰락하기 마련이다. 간신들의 농간에 눈과 귀가 먼 통치자는 끝내 넘어선 안 되는 선을 넘는다. 결정적 오판은 공멸을 부를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이 떠안는다.
‘12·3 비상계엄’을 모의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노상원 전 국군 정보사령관의 수첩에서 섬뜩한 메모가 발견됐다. ‘국회 봉쇄’, ‘사살’, ‘NLL(북방한계선) 북 공격 유도’ 등 자필 기록이 수사당국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정치권 안팎에선 이른바 ‘백령도 작전’ 의혹이 제기됐다. 그가 ‘수거 대상’으로 칭한 정치인 등을 백령도로 납치하다 NLL에서 북한의 대남 공격을 유도해 사살을 도모했다는 의혹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쳐진다. 그는 비상계엄 주동 혐의 등으로 구속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민간인 비선 실세로 지목된다. 둘은 육사 선후배 사이다.
인천 옹진군 백령도는 인천항에서 뱃길로 약 4시간 떨어진 서해 최북단 섬이다. ‘레드라인’(Red Line) NLL을 사이에 둔 서해5도(백령·대청·소청·연평·우도) 해역은 남북 군사적 충돌을 빚은 ‘한반도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남북은 이 해역에서 한국전쟁 이후 첫 서해교전인 ‘제1연평해전’(1999년 6월15일)을 치렀다. 한일 월드컵 당시엔 ‘제2연평해전(2002년 6월29일)이 발발했다. ‘대청해전’(2009년 11월10일)에 이어 이듬해 우리 해군 천안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북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조사된 ‘천안함 피격 사건’(2010년 3월26일)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휴전 이래 북이 쏜 포탄이 남한 영토에 처음 떨어진 ‘연평도 포격전’(2010년 11월23일)도 벌어졌다.
서해5도는 ‘안보의 섬’이다. 북한의 숱한 도발에 맞서 수많은 군 장병의 피와 목숨으로 지켜낸 섬이다. 그런 접경지역에서 전직 군 장성이 계엄군을 동원해 서해5도 주민과 장병들의 생명을 볼모로 공작을 시도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비상계엄의 한 시나리오로 단정하긴 이르다. 그저 망상에 사로잡힌 한낱 낙서일지도 모른다. 그 실체가 수사로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지난해 12월3일 밤 편집국에도 비상이 걸렸다. 잠결에 본 휴대전화에선 긴급 호출이 빗발쳤다. 허겁지겁 거리로 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이 무거운 마음을 짓눌렀다. 서슬 퍼런 과거 군부독재 정권의 낡은 유물로 여긴 비상계엄을 현실로 마주할 줄 몰랐다.
서울 한복판인 여의도에 군용 헬기와 무장한 군인, 경찰 등이 동원됐다. 계엄군은 국회 앞으로 달려나온 시민들과 대치하다 급기야 국회 본관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다. 악몽과도 같은 밤이었다.
전 세계도 경악했다. 촛불 광장의 힘으로 부패 권력을 몰아내고 평화롭게 새 정부를 세운 대한민국 아니던가. 외신들도 긴급 타전했다. 다행히 국회의 신속한 계엄령 해제 의결로 소요 사태는 진압됐다. 가슴 졸이던 국민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와 회복력에 전 세계가 다시 놀랐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과정에선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났다. 국민의힘 국회의원 대다수가 투표 불성립을 위해 본회의장을 떠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신문 1면에 이들의 얼굴 사진이 빠짐없이 실리기도 했다.
국회에 불려 나온 계엄군 수뇌부의 뻔뻔한 태도와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치가 떨렸다. 계엄을 막지 못한 국무위원, 대통령실 참모진의 궁색한 변명에 기가 찼다.
윤 대통령은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선포한 내란 우두머리와 직권남용 혐의 등을 받는다. 검찰과 경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이 경쟁하듯 앞다퉈 수사에 나섰다. 경호처의 비호 아래 관저에 숨어 있던 그가 15일 체포됐다.
국론은 분열되고 사회는 혼란하다.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등 모든 게 위기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임승재 인천본사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