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중후반 가요계에 불후의 명곡들이 탄생한다. 1975년 송대관의 ‘해뜰날’과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1977년 삼형제 록그룹 산울림의 ‘아니 벌써’다. 그 시절 청소년들이 ‘아니 벌써’ 등 산울림 앨범 수록곡에 열광하고 부산 사람들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떼창할 때 전 국민은 ‘해뜰날’을 열창했다. 그 시대가 낳은 명곡들이다.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가 결실을 맺던 시대였다. 1975년 조총련계 재일동포가 고국방문을 결심할 만큼 대한민국이 커졌다. 부산항에 울려 퍼진 환영곡이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다. 토종 록사운드 산울림의 독창성은 성장시대 청년들의 정체성을 대변했다.
산업화의 발목을 잡았던 석유파동은 전화위복이 됐다. 고유가로 달러가 풍족해진 중동 산유국의 건설 붐에 한국 건설이 올라탔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모두 비켜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정주영이 애창하자 현대그룹의 사가가 됐다. 전 국민이 고단한 노동을 “쨍하고 해뜰날”로 씻어내고 ‘해뜰날’을 고대하고 예감했던 시대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1980년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국민은 ‘해뜰날’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읊조렸고 송대관은 미국으로 떠났다. 시대와 노래의 절묘한 조응이다. 1987년 민주화로 직선 대통령의 6공화국이 출범하고 서울올림픽이 열린 그해 송대관이 쨍하고 귀국했다. ‘정 때문에’로 가요계로 컴백하더니 ‘차표 한장’ ‘네 박자’ ‘유행가’ 등 쉴새 없이 히트곡을 내놓으며 태진아, 현철, 설운도와 트로트 4대천왕 시대를 구가했다.
대형 사기 사건으로 장기간 곤욕을 치렀지만 대법원 무죄 판결과 사법리스크를 벗어나 현역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던 송대관이 지난 7일 급환으로 타계했다. 대한가수협회장으로 치러진 9일 발인식에선 후배들이 ‘해뜰날’ 합창으로 그를 보냈다.
대중가요는 당대의 명암과 공명한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요라는 해뜰날 해석엔 칭송과 비하가 엇갈릴 테다. 그래도 쨍하고 해뜰날은 모든 시대의 개인, 사회, 국가의 염원이다. 해뜬 날은 짧다. 해뜰 날을 고대하는 지루한 시간의 기록이 역사다. 희망을 예감하는 시보(時報)로 송대관의 해뜰날이 우리 시대에 자주 울려 퍼지길 바란다. 지금도 국민은 ‘쨍하고 해뜰날’에 목마르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