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원옥 할머니의 길을 따라 반전평화와 인권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자!” 고(故) 길원옥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날에도 수요시위는 어김없이 열렸다. 지난 19일 서울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는 길 할머니의 영정사진과 촛불이 놓였다. 긴 줄의 추모객들은 헌화하며 고인을 기렸다. 추모공연 ‘노래가 된 할머니’는 곡절 많은 삶을 위로했다. “이젠 고단했던 이 세상의 일들을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할머니의 고요하고 따뜻해 보였던 미소를 기억합니다. 그 마음을 닮겠습니다.” 이어지는 추모사와 연대 메시지에 참가자들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길 할머니는 1928년 평안북도 회천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해 보통강 근처에서 자랐다. 가수가 꿈이었던 열세 살 소녀는 공장에 취직하는 줄로만 알았다. 평양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도착한 곳은 만주의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지옥 같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1년 만에 병을 얻어 귀국했지만, 15살에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갔다가 또다시 고초를 겪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8살에야 인천행 배를 타고 돌아왔지만,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실향민이 됐다. 31살에 아들을 입양해 키우며 노래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야만에 유린당한 과거, 50년 동안 홀로 가슴에 동여맸다. 사람들이 가시눈으로 볼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 1998년 일흔이 되어서야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최초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보다 7년 늦었다. 그래서 침묵을 깬 뒤에는 누구보다 단호하게 직언했다. 여생을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로서 헌신했다. 수요시위의 한가운데 자리를 지켰고, 유엔 인권이사회와 국제노동기구(ILO) 총회 등 세계를 돌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다. 2012년 김복동(1926~2019) 할머니와 ‘나비기금’을 만들고, 2017년에는 길원옥여성평화상을 제정했다.

“바위처럼 살아가보자/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바위처럼 살자꾸나….”(노래 ‘바위처럼’의 일부) 길 할머니는 아흔에 음반을 내고 가수의 꿈도 이뤘다. ‘길원옥의 평화’에는 애창하는 15곡이 실렸다. 하지만 끝내 일본정부의 진정한 사죄를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7명뿐이다. 평균 연령 95.7세, 시간이 야속하다. 그럼에도 역사는 바위를 닮아 흔들리지 않는다. 남은 자들이 모두 증인이 될 테니.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