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로 구미 공장 소실, 회사의 폐업 선언
구미에서 고용승계 기다리던 노동자 항의
여성 2명 공장 꼭대기서 지낸지 400여일
부당함 알리려 국회까지 348㎞ 걷기 행진

회사는 법 뒤로 숨었고, 두 여성은 건물 맨 꼭대기로 올랐다. 경기도에서 250㎞가량 떨어진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옥상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여성 노동자 두 명이 400여 일째 고공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이들은 평택시에 위치한 한국옵티칼의 자매회사, 한국니토옵티칼이 구미에 남은 노동자 7명을 고용승계해야 한다 외치고 있다.
이유는 복잡했다. 손쉽게 ‘다른 공장에 취업하면 그만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투쟁은 단순한 일자리 사수가 아니라, 지켜야 할 삶과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 ‘고용과 해고는 기업 고유의 권한’이라는 일차원적인 도식은 부당함을 가렸다. 고용승계를 위해 이들이 택한 수단은 ‘걷기’다. 지난 7일 구미에서 시작해 서울 국회까지 걸어서 향하는 348㎞ ‘뚜벅이 행진’이 오는 23일이면 도내에도 도착한다.
평택, 수원, 안양. 장장 6일간 도내 곳곳에서 활동하며 도민들의 연대를 촉구할 예정인 이들이 그간 겪은 일을 톺아봤다.
화재로 공장 전소… 불길이 삼킨 생계 터전

‘한국옵티칼 사태’ 시작은 지난 2022년 10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 내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LCD 패널용 편광판을 생산하던 공장은 전소됐다. 생계를 책임졌던 경제적 터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당 화재로 사측은 화재 보험금 1천300억원을 수령했지만 공장 재건은 이뤄지지 않았다.
공장은 불탔으나 일감은 남아 있었다. 한국옵티칼의 모기업 일본 닛토덴코는 생산 물량을 평택에 위치한 자매회사 한국니토옵티칼로 옮겼다. 두 회사 모두 닛토덴코가 지분 100%를 보유한 외국인투자(외투) 기업으로 사실상 같은 자본 아래 운영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용승계가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화재 전에도 일손이 부족하면 구미 노동자가 평택으로 가 작업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회사는 공장이 소실돼 경영이 불가능하다며 폐업을 선언했다. 이후 이들에게 희망퇴직서가 날아왔다. 이 과정에서 전체 직원 210명 중 193명이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17명은 남았다. 일감이 있는데 왜 우리가 떠나야 하느냐는 항의였다.
회사는 법을 내세웠다. 구미의 한국옵티칼과 평택의 한국니토옵티칼은 법적으로 별개 법인이라는 논리였다. 말하자면 평택 공장은 고용승계 의무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17명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으나, 회사는 2023년 2월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현재는 7명이 남았다.
고공 위 두 여성… 내려올 길은 고용승계뿐

이렇게 남은 7명이 여전히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중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박정혜 수석부지회장과 소현숙 조직부장이 지난해 1월 8일 구미 공장 위에 올랐다. 옥상에 오른 지는 자그마치 400일이 넘었다.
고공에서의 하루는 고단함의 연속이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몸은 그대로 흔들린다. 여름이면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흐르고, 겨울이면 매서운 칼바람에 손발이 얼어붙는다. 농성장 아래서 동료들이 줄에 매달아 올려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지만 식사 시간조차 위태롭다. 그렇게 두 여성 노동자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중이다.
갈 곳 잃은 7명… 30명 신규 채용 의혹까지

‘7명 대신 30명’. 이들이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평택 한국니토옵티칼이 고용승계를 거부하면서도 30명을 신규 채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이 한국니토옵티칼의 고용보험 취득자 현황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구미 공장이 전소됐던 2022년 10월 4일 이후부터 2023년 8월 말까지 30명이 신규로 채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법적으로 고용승계 의무가 없다고 해도 생산 물량은 그대로 넘어간 상황이었다. 여기에 평택 공장과 같은 일을 하던 구미 공장의 노동자를 대신해 신규 채용까지 이뤄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용할 수 없다고 버티던 회사가 이들을 제외한 채 새로 사람을 뽑은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최현환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장은 “화재가 발생한 이후에 구미 조합원들이 평택 공장으로 가 정합 작업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후 사측이 신규 채용을 하는 와중에도 7명의 고용승계는 끝까지 안 된다고 하는 건 결국 노조 혐오가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고 토로했다. 구미 한국옵티칼과 달리, 현재까지 평택 한국니토옵티칼에는 노동조합이 없다.
한국와이퍼 닮은꼴… 외투 기업 ‘먹튀’ 반복

이번 일은 안산에서 일어났던 ‘한국와이퍼 사태’(2023년 2월12일자 인터넷 보도)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 덴소 자회사 한국와이퍼는 2022년 일방적으로 폐업을 발표했다.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했던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회사가 고의적으로 적자를 유도한 정황까지 드러나며 ‘경영자의 신의성실 원칙 위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긴 줄다리기 끝에 노사는 ‘사회적 고용기금’ 조성에 합의했다. 노동자들의 재취업과 생계 안정을 위한 대안이었다. 그러나 예외적 사례일 뿐, 여전히 다수의 외투 기업은 혜택만 누리고 손쉽게 철수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외투 기업은 국내에 진출할 때 각종 혜택을 받는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최대 7년 감면받고, 공장 부지 임대료 인하나 취득세·재산세 감축 혜택도 가능하다. 경기도의 경우 지방세특례제한법이 적용돼 각각 평택 15년간 85%, 시흥 10년간 85% 등의 재산세 절세를 누릴 수 있다. 국내 사업 청산을 기획하는 일부 외투 기업들이 권한만 행사하고 기업으로서 행해야 할 사회적 책무는 저버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김진희 민주노총 경기본부 본부장은 “외투 기업의 ‘먹튀’ 행태로 노동자들의 어려운 투쟁이 계속됐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여전히 손 놓고 있다. 한국와이퍼처럼 공장을 완전히 청산한 경우도 있지만, 한국옵티칼은 평택 자매공장(한국니토옵티칼)이 있음에도 고용승계를 거부하며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며 “국가 지원과 보상금을 받고도 노동자들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일이 없도록 ‘먹튀방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고용승계와 더불어 해결해 나가야 할 큰 과제”라고 짚었다.
경기도 땅 밟는 ‘희망 뚜벅이’… 연대의 발걸음

고공의 두 명을 뒤하고, 남은 5명의 노동자는 경기도를 거쳐 서울 국회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다. 지난 7일 구미에서 출발한 이들은 오는 23일부터 경기도에 발을 디딘다. 평택역,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 진위역, 수원시청, 안양시청에서 도민들과 연대해 고공농성을 알리고 고용승계를 촉구할 계획이다.
김진희 본부장은 “박정혜, 소현숙 두 동지가 ‘이겨서 땅을 딛고 싶다’며 고공에서 버티는 가운데, 나머지 해고 노동자들은 ‘희망 뚜벅이’를 진행하고 있다. 도내 노동계는 지난해 평택 공장에 천막 농성장을 설치한 이후 매달 투쟁문화제를 열며 연대를 이어왔다. 마찬가지로 23일부터 28일까지 도민과 도내 노동자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지역 차원에서도 지자체와 노정교섭을 통해 고용안정을 위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한국옵티칼 사태와 관련해 지난 19일 평택 한국니토옵티칼에 방문해 신규 채용 의혹, 고용승계에 관한 현재 입장 등 사측의 답변을 듣고자 했으나 정문 앞 경비원을 통해 “담당자가 못 나온다고 전해달라 했다. 추후 사전 협의를 거쳐 와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전화로도 문의했으나 “담당자가 10분 뒤에 자리에 오니 다시 전화를 하라”고만 응대할 뿐, 이후 수차례 발신했음에도 사측은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