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손으로 헌법을 만들었으되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나라 사법살인의 1호 피해자가 된 죽산 조봉암(1899~1959)은 고향 강화도에서의 3·1 만세운동을 아주 특별하게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에서 강화도에서는 어느 작은 부락 하나 빠지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였고, 그게 1개월이나 지속되었다고 썼다. 죽산 자신도 이때의 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강화도의 만세운동은 3월을 넘어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당시 우리나라 어느 곳 하나 조용한 곳이 없었지만 강화처럼 이렇게 너른 곳에서 한 달여나 만세운동이 계속된 곳은 그 사례를 찾기 어렵다.

백범 김구(1876~1949) 역시 강화를 아주 특별하게 여겼다. 백범은 인천에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했다. 그중 한 번은 탈옥을 감행해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인지 백범은 인천을 일컬어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고 했다. 백범이 탈옥을 결행토록 한 인물은 강화에 사는 김주경이었다. 백범은 이 일을 잊지 못해 탈옥 후 강화에서 한동안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그 바쁜 해방 직후에도 강화를 찾았다.

강화도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온몸으로 막아서고 저항한 곳이다. 거기에 강화만의 저항 정신이 있다. 조선말 강화에서는 특유의 철학적 흐름이 있었다. 하곡 정제두(1649~1736)를 필두로 하는 양명학자들이 그들이다. 우리 고유의 서체라 할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 조선 최후의 문장가로 불리는 영재 이건창(1852~1898)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강화학파라 칭한다. 이러한 강화의 철학적 전통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죽산과 백범이 그걸 증명한다.

올해 106주년 3·1절을 맞아 강화역사박물관에는 ‘강화의 독립운동관’이 들어섰다. 그 한쪽에 강화의 독립운동가에게 엽서 보내는 코너가 있다. 지난 2일 찾은 그곳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이가 눈에 띄었다. 누가 볼까 싶어, 고개를 바짝 숙이고 엽서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뭐라고 썼냐고 물으니,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쓴 엽서가 독립운동가에게 닿기 전에 그 내용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저 위에 계신 강화의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번질 듯했다.

/정진오 국장(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