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남 이경성(1919~2009)이 인천시립박물관의 아버지라면, 우현 고유섭(1905~1944)은 인천시립박물관의 할아버지다. 석남이 인천시립박물관 개관을 준비하고 초대 관장을 맡아 그 기틀을 마련했다면 우현은 석남을 박물관의 길로 들어서게 한 인도자였다. 우현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꿰어 인문학적 답사의 길을 닦기 위한 ‘인천광역시 우현의 길 조성 및 관리·운영 등에 관한 조례’가 이번 주 중 공포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조례에서 제시하는 우현의 길에 박물관 관련 내용이 부실해 보인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46년 4월 1일 개관했다. 석남이 초대 박물관장으로 발령받은 것은 1945년 10월 31일이었다. 석남은 해방 직후 미군정기라고 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5개월의 준비 과정을 거쳐 인천시립박물관을 탄생시켰다. 1949년의 ‘인천고적조사보고서’ 같은 인천 박물관계의 중요 저작물도 석남의 손에서 나왔다.
1937년 석남은 법조인을 꿈꾸며 일본 와세다대 법률과에 입학했다. 이때 우현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석남과 함께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우현의 처남이 연결 고리였다. 당시 우현은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었다. 석남과 우현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했다. 석남은 우현이 보내달라는 책을 구하기 위해 도쿄의 헌책방을 뒤지기도 했다. 우현은 석남이 읽을 책을 지정하기도 했는데 그 첫 번째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의 ‘통론고고학’이었다. 석남은 법률 공부를 때려치우고 미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기도 하다.
1974년에는 우현 30주기를 맞아 중구 송학동에 있던 인천시립박물관 뜰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를 위해 건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각계에서 60만원의 성금이 모였다. 비에는 ‘우리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로 시작하는 우현의 글을 새겼다. 글씨는 동정 박세림(1925~1975)이 썼다. 인천시립박물관은 1990년 5월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하면서 기념비도 함께 옮겼다. 지금도 박물관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 비의 내력을 알려주는 안내문이 그 어디에도 없다. 이 때문에 예술미 넘치는 우현 기념비가 졸지에 정체불명의 돌덩이가 되고 말았다. 곧 시작할 우현의 길 조성 사업에서 인천시립박물관의 뿌리를 살필 수 있게 하는 우현 기념비가 빠져서는 안 될 터이다.
/정진오 국장(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