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롭다’는 말은 위험하다. 특히 직업이 기자라면 더욱 경계해야 한다. 기자는 사회운동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종 보이는 ‘정의로운 기자’라는 꾸밈말은 ‘기레기’만큼이나 선동적이다. 언론은 단지 정의를 ‘추구’할 뿐이다. 방점은 분명 뒤에 찍힌다.
대중은 종종 기사를 통해 ‘정의로운 편’에 속했다는 효능감을 얻고 싶어 한다. 누구도 가해자로 규정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선악 구도가 명확한 기사일수록 독자는 활자를 읽기만 했을 뿐인데도 도덕적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런 기사는 때로는 세상을 흐리게 만든다. 파주 용주골 성노동자 여성들이 처한 상황이 그랬다.
사회는 이곳 성노동자 여성들을 일차원적인 인식 속에 가뒀다. 불법적인 일에 자발적으로 복무하는 ‘범법자’. 이들이 공권력에 의해 터전에서 쫓기는 현실은 고민에서 배제된다. 철거가 끝나면 성매매는 사라지는가? 안타깝지만 아니다. 용주골에서만 사라질 뿐이다. 보편 다수의 눈앞에서 사라진 그때, 강제 철거 정책은 ‘정의로운 성과’로 기억돼 왔다.
여기서 기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현장 취재를 열 번 가는 것보다 ‘어떤 기사’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일이 더 고되다. ‘정의로운 기자’라는 타이틀을 좇는 순간, 기사는 쉬운 방향으로 흐른다. 이는 독자가 선악 구도 속에서 효능감을 느끼도록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도덕적 서사로 포장하는 것이다. 성노동자 여성을 포주에게 억압당한 불쌍한 존재로 설정하는 피해자 서사도 마찬가지다.
강제 철거가 시작된 지금,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기사’가 아니다. 저널리즘은 독자에게 손쉽게 옳고 그름을 나눠주는 도덕적 가이드가 아니라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한다.
저널리즘은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충돌 지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보편 다수의 평가를 기록하는 대신, 지워지는 사람들의 실제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건 결코 친절한 일은 아니다.
/유혜연 사회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