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사(檜巖寺)는 시종의 기록이 없는데 역사에 남긴 자취는 화려하다. 국가유산청 공식기록은 1328년 인도 승려 지공이 처음 지은 절이라 했지만, 동국여지승람은 고려 명종 4년(1174년)의 기록으로 천년 고찰의 근거를 남겼다. 지공은 중창의 주역으로 회암사는 인도-원-고려로 이어진 동아시아 불교 교류의 상징적 증거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를 “아름답고 화려하고 장엄하기가 동방에서 최고”라 했다. 회암사 중창은 불심으로 나라를 일으키려는 고려 왕조의 국책사업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뒤에도 태조 이성계 덕분에 회암사는 숭유억불의 왕조에서도 왕사인 무학이 주지를 맡아야 할 정도로 조선제일사찰이자 왕찰의 위엄을 유지했다. 형제상잔이 부자상잔으로 번질 뻔한 드라마틱한 개국 서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명종 때까지 왕찰의 권위를 이어갔던 회암사가 갑자기 임진왜란 시기 선조실록에 ‘회암사 옛터’, 폐사지로 등장한다. 실록에 소실 시기와 원인의 기록이 없다.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명종실록의 기사로 유교 사대부들의 방화로 짐작할 뿐이다.

회암사를 역사에서 길어올린 주역이 경기도다. 1960년대 국가사적 128호로 지정됐을 뿐 절터의 흔적도 없이 방치됐던 황무지였다. 이를 경기도가 1997년부터 도책사업으로 회암사지 발굴에 착수해 2019년 완료했다. 32만3천㎡의 방대한 사지(寺址)에서 왕궁의 규모와 흔적을 갖춘 70동의 건물터와 유물들을 고스란히 찾아내 고려·조선 두 왕조가 섬긴 당대의 국제적인 불교 성지임을 증명한 것이다.

국가유산청이 13일 ‘양주 회암사지 유적’을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으로 선정했다. 2022년 잠정목록에 지정된 지 3년만에 세계유산 등재에 한발 더 다가섰다. 국내 14개 세계문화유산 중에 경기도의 수원화성, 남한산성, 조선왕릉이 있다. 회암사지가 등재되면 경기도의 문화적 가치가 확장된다. 등재신청 대상이 되기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 회암사지는 성곽과 능처럼 입체적인 유산이 아니라 등재의 명분을 세우는 데에 난관이 예상된다. 세계인이 공유해야 할 종교, 문화, 역사적 의미를 설득할 문헌의 발굴과 치밀한 고증이 중요하다. 국가유산청과 경기도와 양주시의 협업이 절실하다.

/윤인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