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 교회에 끌어넣고 불을 지르며 총을 쏘아 무차별하게 생명을 빼앗아간 집단학살이었다. 공포와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은 마구 쏘아대는 흉탄과 타오르는 불길에 육신을 잃는 생죽음을 당했지만 독립을 위한 그들의 영혼은 결코 잿더미에 묻히지만은 않았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화성 향남면 제암리는 학살의 표적이 됐다. 그해 4월 15일 일본군은 “발안장터에서 심하게 매질한 것을 사과하겠으니 모여달라”고 속였다. 일하던 농민들이 제암교회 예배당에 들어서자 밖에서 못질하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인일보는 기획시리즈 ‘항일의 민족혼을 찾아’(1982년 9월 26일자 3면 보도)에서 두렁바위골의 비극을 생생히 기록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선교사들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진상 보고서를 캐나다 선교부로 보냈다. 일본의 비인도적 범죄가 알려지며 세계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일본은 외교문제로까지 불거질 것을 우려해 학살을 지휘한 중위와 군인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하지만 누구도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망국민의 원통함이 땅을 쳤다.

1959년 순국기념탑이 처음 세워졌지만 제암리 학살은 잊히는 듯했다. 1982년에서야 희생자 유해발굴이 이뤄졌고, 순국선열 23인 합동묘역이 조성됐다. 2001년 3월 1일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이 문을 열고, 제암교회도 원형으로 복원됐다. 순국기념관을 재구성해 지난해 4월 15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공식 개관했다.

“…시산혈하(屍山血河) 아, 조선 사람이라면 우리 동포라면 누구나 반항과 만세와 살육이 교착한 이 처참한 조선 역사의 한 페이지를 혈루와 통분이 없이는 회고하지 못할 것이다….” (‘발안 제암동 대학살 사건을 회상하자’ 문건 중에서. 박현철씨 제공)

해방 직후 혼란기에도 제암리 학살을 잊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경인일보는 지난 14일 관련 자료를 단독입수해 처음 공개했다. 1945년 10월 20일 제암동 교회당에서 희생자 추도회가 열렸음을 알 수 있다. 향남면 인민위원회가 주최하고, 수원청년동맹이 후원했다. 제암리의 서사를 완성하는 일은 멈춰서는 안 된다. 정확히 기억하고 명징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 두렁바위에 흘렀던 피눈물을 닦을 수 있다.

/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