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쌀은 더 이상 양으로 승부하는 식량이 아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쌀을 매일 먹는 주식이 아니라 특정한 기분이나 요리에 따라 고르는 ‘기호식품’으로 여긴다. 카레에 어울리는 쌀, 오므라이스에 잘 맞는 쌀, 삼겹살과 어울리는 쌀처럼 용도 기반의 선택이 뚜렷해지고 있다. 여기에 미각의 세분화, 건강에 대한 관심, 식문화의 감성화가 더해지며 ‘쌀 한 공기의 가치’가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일본은 예외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수십년에 걸쳐 쌀 소비량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위기를 ‘프리미엄화’라는 전략적 전환점으로 삼았다.
지역마다 특색 있는 고품질 품종을 개발하고 철저한 품질 관리와 브랜드 마케팅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고시히카리, 유메피리카, 쓰야히메 같은 품종은 이제 일본 내에서도 ‘선택받은 밥’으로 인식된다. 심지어 도쿄의 백화점에서는 2㎏에 8만원이 넘는 쌀이 판매되며 선물용으로도 인기다.
이들은 단지 품종 개발에 그치지 않았다. 쌀이 자란 지역의 풍토와 농부의 철학, 그리고 밥맛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아우르는 ‘스토리텔링’으로 소비자와 감성적으로 연결되었다.
‘쌀이 곧 문화’라는 인식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쌀바(米BAR), 편집숍, 밥 짓는 도구까지 포괄하는 큐레이션 서비스는 쌀의 정체성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여주는 분명 한국형 프리미엄 쌀 전략의 선두에 있다. 진상미는 세종대왕에게 진상되던 품종의 후손이고, 남한강의 맑은 물, 황토 사질양토, 큰 일교차 등 최적의 자연환경에서 자란다. 국내 유일의 ‘쌀 산업 특구’로 지정된 지역이자, ‘대왕님표 여주쌀’이라는 강력한 브랜드도 갖고 있다. 그야말로 프리미엄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여주는 여전히 ‘좋은 밥맛’이라는 단일 메시지에 머물러 있는 면이 있다. “예로부터 왕에게 진상되었다”는 역사성은 강력한 자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 소비자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다. 젊은 세대는 ‘왜 지금 이 쌀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오늘의 언어를 원한다.
일본이 브랜드 쌀을 700종 넘게 등록하고, 수억엔의 홍보비를 투자하며 시장을 선점한 것을 보면, 여주는 지금이 두 번째 도약의 분기점이다. 품종 하나만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젠 콘텐츠와 체험이 결합된 ‘쌀 경험’을 만들어야 할 시기다.
단지 쌀이 아니라 ‘경험’과 ‘감성’을 파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는 여전히 “맛있는 쌀이니까 사주세요”라는 프레임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여주쌀은 분명 고품질이다. 세종대왕에게 진상되던 역사와 남한강의 물, 황토 토양, 일교차 등 과학적 기반은 충분히 경쟁력 있다. 진상미처럼 전용실시권을 보유한 품종도 여주만의 자산이다. 하지만 이제 그 ‘명성’이 소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주는 프리미엄 쌀의 조건을 갖췄지만 일본처럼 브랜드로서의 ‘경험 가치’를 설계하지 못한 채, 여전히 ‘맛’이라는 단일 메시지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여주는 ‘대왕님표’라는 네이밍 이상으로 소비자와의 정서적 접점을 만들고 있는가? 브랜드 쌀이 진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더 필요하다.
첫째, 콘텐츠화다. 밥맛 그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 밥 짓는 법, 어울리는 반찬, 여주쌀로 만든 요리 등을 짧고 강한 콘텐츠로 연결해야 한다. 둘째, 소통 방식의 전환이다. 지금은 ‘정보 전달’보다 ‘경험 공유’의 시대다. 여주쌀도 SNS, 유튜브 등 MZ세대가 사용하는 채널에서 감각적으로 소비자와 소통해야 한다. 셋째, 다품종 다채널 전략이다. 진상미 외에도 특화된 품종을 개발하고, 호텔·레스토랑·HMR·도시락 등 다양한 용도로 쌀을 분화시켜야 한다.
여주는 이미 전국 유일의 쌀 산업특구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가능성만으로는 경쟁력을 지키기 어렵다. 일본처럼, 여주도 자신만의 ‘쌀 철학’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쌀은 왜 특별한가”에 대한 답이 단순한 미각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와 감성, 철학과 체험으로 확장될 때 여주쌀은 그 명성을 진짜 ‘브랜드’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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