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다쳐 직장 옮기려 했지만

특정사유 있어야 사업장 변경 가능

불법기숙사 신고 않는 조건에 이직

과거 헌재 ‘사업운영 방침’ 판결도

 

“기본권 없어 이주노동자 위험지대”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마치 노예가 된 것 같았어요….”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는 지난해 상반기 ‘고용허가제’(E-9 비자)를 통해 국내에 입국했다. 고용허가제는 구인난을 겪는 사업주에게 정부가 고용 허가를 받은 이주노동자를 연결해주는 제도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인천 한 주물공장에서 궃은일을 도맡아 하던 지노이는 무거운 짐을 옮기다 그만 허리를 크게 다쳤다. 의사는 “작업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질환이 악화될 수 있다”는 소견을 냈다.

통증 등으로 더는 이곳에서 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일터를 알아보기로 했다. 열악한 숙소도 이런 결심에 한몫했다. 지노이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 지붕과 곰팡이가 핀 가구들 사이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냈다. 낡고 오래된 화장실에선 악취가 풍겼다.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지노이는 열악한 숙소에서 동료들과 지냈다. 낡고 오래된 화장실에선 악취가 풍겼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지노이는 열악한 숙소에서 동료들과 지냈다. 낡고 오래된 화장실에선 악취가 풍겼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고용노동부는 2021년부터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하는 사업주에게는 이주노동자 고용을 불허하기로 했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이런 숙소가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지노이를 사업주가 막아섰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이주노동자는 고용주의 근로계약 해지와 만료 후 갱신 거절, 사업장 휴·폐업, 근로조건 위반 등의 사유가 있을 때만 사업장을 변경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고용주의 동의를 얻은 뒤 고용노동부에 사업장 변경을 신청해야 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한 사업장에서 고용허가제 취업활동 기간인 4년10개월을 버텨야 한다.

그는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한 시민단체에 도움을 청했다. 그와 상담한 시민단체는 산업재해 신청을 돕고 불법 기숙사 문제를 노동당국에 신고하기로 했다.

그제야 사업주의 태도가 바뀌었다. 산업재해 신청과 불법 기숙사 문제를 신고하지 않는 대신 이직에 동의해주기로 한 것이다.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방글라데시 출신 지노이(가명·32)가 인천 한 주물공장에 다니며 묵었던 숙소. /포천이주노동자센터 제공

최근 거처가 마땅치 않고 치료도 받아야 해 잠시 고국으로 떠난 지노이는 경인일보와 통화에서 “좁고 더러운 기숙사에 여러 명이 살면서도 버텼는데 너무 아파서 더는 일할 수 없었다”며 “기숙사 문제 등을 신고한다고 하니까 그제야 사업장 변경에 동의해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노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이주노동자 5명이 지난 2021년 고용허가제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 ‘평등권’ ‘신체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근로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이주노동자가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갱신을 거절하고 자유롭게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다면 고용주는 인력의 안정적 확보와 원활한 사업장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7대2 합헌 결정을 내렸다. “최근 불법체류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의 효율적인 관리 차원에서도 사업장의 잦은 변경을 억제하고 취업활동 기간 내에서는 장기 근무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지노이 등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는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지노이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업주에게 불만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일만 하는 노예 같았다고 했다”며 “우리 정부는 내국인 노동자가 기피하는 업종에 외국인 인력을 마구 쓰고 있지만 이들의 기본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관련법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이주노동자들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일터에서만 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변민철기자 bmc0502@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