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대 총선이 열린우리당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한나라당 또한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긴 의석을 갖게 됐으니 상대적 실망감 속에서도 좌절할 정도의 결과는 아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한마디로 놀라운 사건이다. 또한 집권경험을 가진 민주당과 20년 가까이 정치권의 캐스팅 보트 역할을 맡았던 자민련의 퇴조 또한 눈에 띄는 변화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표면적인 결과에 일희일비해서는 안된다. 총선 결과에 함축된 국민의 명령을 읽어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한국정치의 새 출발을 알리는 유의미한 결과를 남겼다. 반세기 넘게 우리 정치를 지배했던 갖가지 악폐를 철저하게 심판했다. 부정부패를 외면했고 지역주의의 큰 틀을 무너뜨렸다. 불법정치자금을 차떼기로 끌어다 쓴 한나라당이 영남권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대패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미워도 다시한번을 외치며 지역감정에 기댔던 민주당과 자민련이 강제 퇴출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 국민은 그 자리에 진보적인 정치 신념과 정책을 앞세운 민주노동당을 제3당으로 세우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여야 대다수 정당이 정책을 외면하고 감성적 호소를 앞세웠지만 유권자들은 속지 않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긴 결과에 자만해선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은 열린우리당의 감성적 호소에 귀기울여 표를 준 것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집권세력의 총체적 실정과 경박한 정치력에 비해 야당의 부정부패와 지역주의를 훨씬 심각한 심판의 대상으로 판단한 것 뿐이다. 여당의 승리는 국민이 차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당초 77.2% 까지 예상됐던 투표율이 16대 총선의 그것을 겨우 웃도는 59.9%에 그친 것은 침묵으로 표현된 국민의 경고이다.

정치권은 총선결과로 드러난 국민의 뜻에 따라 불행한 과거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정치의 출발점에 서야 한다. 새정치가 지향해야 할 시대적 화두는 상생(相生)이다.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정당들이 대화로 통합을 추구하지 않으면 골이 깊어진 세대·계층간의 갈등은 물론 영·호남의 뿌리깊은 정치적 경쟁의식을 해소하기 힘들다. 합법의 틀 속에서 국정운영의 철학과 정책으로 경쟁하고 그 결과에 국민을 통합시키는 정치를 해야 한다. 17대 국회 이전이라도 대통령 탄핵사태, 이라크 파병 등 목전의 현안을 대화와 협력으로 해결하는 정치력을 발휘해 새 정치의 출발을 알려야 마땅하다.

창당 수개월만에 명실상부한 집권여당의 면모를 갖춘 열린우리당은 규모에 걸맞은 포용의 정치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이미지와 상징을 앞세운 소수여당의 정치 행태를 청산하고 정책으로 국정 비전과 개혁의 진정성을 구현해야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은 합리적인 비판으로 여당을 견제하고 집권을 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국민은 슈퍼 재·보선을 통해 여야 정당들의 자기정화 과정을 엄격하게 평가할 것이다.

국민은 17대 총선을 통해 새정치의 출발을 명했다. 이제 정치권이 진정한 대의민주주의 실천으로 화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