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차드 닉슨이 1968년 1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중앙정보국(CIA)에 대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모종의 기밀문서를 제출하라는 지시였다.
그것은 7년 전에 카스트로를 축출하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이 단행했다가 실패하여 크게 망신당한 쿠바의 피그스만(灣) 침공계획서였다.
사실 실시는 케네디가 했지만 계획은 전임자인 아이젠하워 정부때 만든 것이고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계획서 작성을 주도했던 것이며 따라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국민적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했던 것.
그런데 CIA는 “아무리 대통령의 지시라도 합당한 이유없이 특급기밀서류를 줄 수 없다”고 거절해 닉슨을 머쓱하게 했다.
4년 뒤 5명의 괴한들이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러 침입했다가 체포되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배후와 은폐의혹과 관련, 의회와 언론이 연일 공격하고 연방수사국(FBI)의 수사가 백악관을 압박해오자 닉슨은 리차드 헬름스 CIA국장에게 “FBI의 수사를 막거나 방해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대해 헬름스 국장은 “CIA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것이 기본원칙”이라며 거절했다.
세계 모든 나라마다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정보기관의 운영스타일에 있어 선진국과 후진국은 크게 다르다.
선진국의 경우 정보기관의 활동이 철저히 비밀리에 이뤄지고 대표 등 몇몇 간부 외에 직원들은 일절 노출되지 않으며 정치에 일절 간여하지 않고 오직 국가보위 국익의 획득 및 옹호만을 위해 활동한다.
반면 후진국의 경우 정보기관은 권력기관 그것도 국민에게 공포감을 주는 권력기관이고, 기관의 존재와 직원들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키며 정치는 물론 모든 분야에 개입하는 한편 국가보다 권력자의 정권유지를 위해 활동하는게 일반적이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어떠한가. 대외적으로는 국가의 보위를 최고·최대의 임무로 내세우고 있다.
운영에 있어서는 초기에 비해 많이 개선되고 과학화·현대화했다고 하지만 국민의 시선이 여전히 부정적인 가운데 아직도 후진국형(型)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정보기관의 발자취는 1950년대에는 치안국 정보과, 시·도경의 대공분실 그리고 군의 방첩대가 담당했고, 장면 정권때는 중앙정보위원회를 설치했었으나 5·16 쿠데타로 무산됐다.
최초의 본격적인 국가정보기관은 5·16후 미 CIA를 모방해 창설한 중앙정보부로서 창설후 정보부가 처음 한 일은 증권파동을 일으켜 모은 돈으로 공화당을 비밀리에 사전 조직한 것이다.
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시절 한쪽으로는 간첩을 열심히 잡고 다른 쪽으로는 반(反)정부 세력과 야당탄압, 정치공작과 개입 그리고 모든 기관에 대한 사찰 등 무소불위한 공포의 대상으로 국민을 위압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6·29선언 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가 계속되면서 정보부의 개혁과 쇄신을 시도한다고 요란한 소리를 냈지만 파행적·불법적인 행태는 여전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특히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위 정치에 개입한 간부·직원들을 정리한답시고 20~30년 동안 음지에서 묵묵히 업무에 충실했던 상당수의 대북 및 해외전문가들까지 무더기로 정리하여 정보기관의 전력(戰力)을 약화시킨 것은 참으로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그뿐인가.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국정원장을 4명씩이나 교체하고 요직에 특정지역 출신들을 편중 임명했으며 차장과 과장 등 일부 직원들이 추잡한 몇몇 게이트·부정 사건에 관여함으로써 국민의 불신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장고(長考) 끝에 마지막 장관급 인사인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로 인권과 노동문제 전문법조인인 고영구 변호사를 내정했다.
선진 강대국들의 정보기관들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된 이후 각기 새로운 시대조류에 맞게 내부적으로 기구 개편을 단행해왔으며 국정원도 일부는 이런 흐름에 부응하는 시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정원이 새시대에 대비하는,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첫째, 말로만이 아니라 정치병(病)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둘째, 대북 및 해외정보의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셋째, 권력자 및 권부(權府)와 일절 접근·밀착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국정원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언제나 국민이 도움을 청하고 또 협력할 수 있는 국민 눈높이의 전문정보기관으로 재출범해야 한다. 끝으로 정권보위가 아닌 국가이익·국가보위만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 돼야 할 것이다.
국민은 국정원이 과연 얼마나 달라지게 될지 지켜볼 것이다./이성춘(언론인·前고려대 석좌교수)
[이성춘 칼럼]국정원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입력 2003-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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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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