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수원에서 개최된 세계생명문화포럼은 주목할만한 행사였다. 무엇보다도, 100여명의 동서양 석학과 환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반다나 시바, 미조구치 유조, 리카르도 나바로, 장파, 김지하, 유승국, 장회익, 임길진, 박이문, 박재일, 이병철, 도법, 최재천 등등 이름의 무게가 만만치 않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21세기의 화두 생명을 논의하는 장이 경기도의 중심도시에서 펼쳐졌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도 불러도 좋을 듯하다.
이들은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생명을 어떻게 살려나갈 것인가'를 토론했다. 구호로서의 '생명과 환경'을 넘어서서, 우리의 문명을 뿌리부터 바꿔나갈 실제적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사상과 전통 속에서 새로운 생명문화의 패러다임을 모색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포럼 참가자들이 오늘날 생태위기의 진단과 처방에 대해 모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명의 전환'을 외치는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마침 찾아온 한파를 무색케 할만큼 충분히 뜨거웠다고 믿는다. 나흘간의 포럼은 '생명선언문' 발표와 생명문화 탐방을 끝으로 21일 막을 내렸다.
그러나 성대하고 풍성했던 '잔치'의 뒷맛은 그리 개운치 않다.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포럼이 막상 다가오면서 왠지 무거워지기 시작했던 마음은 행사 내내 편치 않더니 급기야 더욱 거북해지고 말았다. 귀기울여 들어볼 대목이 그토록 많았고, 앞으로 더욱 깊이 들여다봐야 할 주제들이 넘쳐났음에도 불구하고 포럼 이전보다 공허감이 더욱 커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곰곰이 되짚어 보니, 경기도가 포럼을 준비한 이유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 걸린다. 이번 포럼은 지난 봄 김지하 시인이 경기도에 와서 조찬강연을 하고 간 무렵부터 논의가 시작됐다. 경기도는 김 시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포럼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식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경기도가 4억원의 예산을 지원해 마련됐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자치단체가 심각한 지구생태계와 생명의 문제를 진정으로 걱정해서 이깟 정도의 예산을 쓴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몇 배의 돈을 들여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생명과 환경'이라는 근본적인 화두조차 하나의 '유행'으로 받아들여, '말잔치'의 장이나 한번 펴보자는 의도라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세계적인 명망가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는 사실을 한줄의 치적으로 기록해둘 요량이었다면, 이는 오히려 생명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경기도가 이런 뜻으로 세계생명문화포럼을 개최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비록 포럼 개막식에서 일부 분노한 지역 환경운동 활동가들이 경기도의 반생명적인 개발위주 정책과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규탄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경기도가) 모든 생명을 아름답게 모시고 위기에 처한 모든 생명을 힘차게 살려나가는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도지사의 다짐 또한 진심이라고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물론 환경과 생태적인 측면에서 그동안 경기도의 정책은 비난받을 측면이 적지 않다. '경제'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고 '개발'에 치중해온 도정이 과연 친생명적이었는지 경기도 스스로도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 누구보다도 이번 포럼에 참가한 석학과 운동가들이 내놓은 말들은 바로 경기도 자신에게 되돌아와 꽂히는 화살이다.
문제는 도지사가 환영사에서 밝힌 그대로, 앞으로의 행보다. 생명포럼이 한갓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었다면, 이제는 포럼에서 제기된 화두들을 도정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구체적인 몸부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비대해진 경기도가 '모심과 살림'을 제대로 해 나가는지 지켜볼 일이다. /양훈도(문화체육부장)
생명포럼 그 이후
입력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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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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