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잣집에 대대로 전해지는 400년 전통의 가훈(家訓) 중 한 구절이다. 이 가르침에 따라 최씨 집안에서는 한 해 농사에서 거둔 수확량이 만석을 웃돌면 일정한 양을 지역사회에 돌려줬다고 한다. 가을걷이에서 쌀 만가마니가 넘을 것 같으면 소작농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이었다고 하니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주민이 어디 있겠는가.
12대 만석꾼, 9대 진사를 배출한 조선 최고 부잣집의 선행은 그 많던 땅과 재산을 모조리 영남대와 그 전신인 대구대에 아무런 대가없이 내놓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지은 시오노 나나미는 '천년 로마를 지탱한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고 거듭 강조했는데, 최씨 가(家)의 삶은 우리에게도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이 엄연했음을 전한다.
원광대에서 동양학을 가르치는 조용헌 교수는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라는 책에서 '한국에도 명부(名富)가 있다. 그 집이 바로 경주에 있는 최 부잣집'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판교 인근의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땅을 사고 거기에 집을 짓고 있는 일부 특권층의 행태를 보면서 최부잣집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이라면 어떠했을까.
이연택 전 대한체육회장이 김병량 전 성남시장의 친인척과 공동명의로 대장동 땅을 싼값에 받는 대가로 시행사의 청탁을 받아 인허가 과정에 개입한 일로 구설에 오르다 마침내 구속됐을때, 보이지 않는 인위적 힘이 작용한 것이라고 여겼었다. 참여정부가 밀었다는 김정길 현 대한체육회장에게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려 누군가 이 전 회장의 구린 구석을 흘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에서다.
지금도 의문은 여전하지만 더 궁금한 건 당시 성남시가 대장동 땅에 무려 135건이나 되는 건축허가를 무더기로 내준 배경과 그 땅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결과는 충격이었다.
전총리와 장관, 국회의원, 현직 검사장, 대그룹 계열사 사장 등 정·관·재계 인사 20여명이 자녀와 부인 등의 명의로 이 땅을 갖고 있었다.
땅을 사들인 시점도 절묘했다. 대부분 인허가가 난 2000년 하반기를 전후해 거래가 이루어졌다. '남단녹지'에 이어 '보전녹지'로 꽁꽁 묶여 수십년간 개발행위가 금지된 땅이, 쓸모를 찾지 못해 거래마저 뚝 끊겼던 산자락이 어느날 갑자기 무더기로 사고 팔린 것이다.
특권층을 꼬드겨 투기판에 끌어들인 건 부동산 시행업자였다. 그는 아예 처음부터 가진 자, 힘있는 층을 끌어들여 한 판 벌이기로 작정을 하고 대장동 땅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그러면서 호기 어린 말투로 120여 필지의 땅 주인들 가운데 정·관계 고위인사가 20% 정도라고 자랑처럼 전했다.
말 많고, 탈 많은 대장동 주택단지는 인허가 과정에 악취가 나고 땅을 가진 사람들의 면면 또한 화려한데, 화를 입은 건 고작 이연택씨 혼자 뿐이다. 세간의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더구나 특권층 수십명이 땅을 사들인 행위는 '대한민국의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지만 어떻게 재산을 모았느냐 하는 점 역시 쓰는 것 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부적절하게 부를 쌓은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에, 우리 사회에 재산을 내놓았다는 소리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가진 것도 모자라 염치마저 내던지고 투기장에 뛰어 든 노블레스에게 자선은 남의 얘기일 지 모른다.
'네(소작농)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최씨 家의 가훈은 상생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일부 어글리 노블레스(ugly-noblesse)를 향한 준엄한 꾸짖음으로 들린다.
어글리 노블레스
입력 2005-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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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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