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이 불러일으킨 독립기운을 타고 국내외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7개나 된다. 이 가운데 4개(조선민국임시정부, 고려공화국, 간도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는 전단으로만 전해질 뿐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 그러나 비록 영토와 국민은 빼앗겼을 지라도 엄연히 한민족에게 주권이 있음을 선포하고 나름대로 헌법과 각료를 구성한 3개의 임시정부가 있었다.
1919년 3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탄생한 국민의회(노령정부), 4월 서울에서 성립된 대조선공화국(한성정부), 같은달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정부다. 이 가운데 성립시기가 가장 빨랐던 노령정부가 겪어야 했던 영광과 좌절의 자취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바로프스크에서 기차편으로 14시간만에 우수리스크에 도착한 취재팀은 우선 체체리나 거리부터 찾아 나섰다.
작은 창문이 여럿 달린 러시아식 목조 주택이 길 양편으로 늘어선 한적한 주택가. 길가에 의자를 내놓고 지팡이를 짚은 채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할머니만 한 분 보일 뿐 길을 물어볼 행인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큼직한 주소판이 집집마다 붙어있어 다행이다.
청구신보 1917년 11월 18일자는 전로한족중앙총회, 청구신보사, 한인회관이 모두 한 건물에 있었고 주소는 자나드보로프스카야 31호라고 했다. 그 해 5월 성립한 제1차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곧 국민의회의 모태이고, 청구신보는 기관지였다. 자나드보로프스카야가 체체리나 거리로 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기사에 있는 31호를 찾아내기만 하면 노령정부가 자리잡았던 건물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1차 시도는 실패였다. 거리이름 뿐만 아니라 호수도 모두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전 31호 자리로 추정되는 곳을 겨우 찾아냈지만 그곳은 학교 운동장이었다. 실망을 삭이며 아침햇살만 가득한 텅 빈 운동장에서 노령정부의 짧은 역사를 잠시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러시아 한인사회는 1919년 2월25일 이곳 우수리스크에서 제2차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소집했다. 사회주의 계열과 만주지역 대표까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노령과 만주 동포를 대표하는 입법기구로서 자신의 조직위상을 재정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스스로 조선국민의회라 칭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독자적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미니 박스 참조).
완전한 임시정부의 모습을 갖춘 것은 3월17일부터 연해주 한인사회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만세시위 직후다. 문창범(文昌範)을 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 민족의 독립과 일제에 대해 혈전을 선포했다. 근거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 국민의회는 비록 노령에 있지 않더라도 명망이 높은 민족지도자를 망라한 행정부도 조직했다.
대통령 손병희(孫秉熙), 부통령 박영효(朴泳孝), 국무총리 이승만(李承晩),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강화대사(講和大使) 김규식(金奎植)이 추대됐다. 각국 영사관에도 대한국민의회의 성립을 통보했다. 미국 프랑스 영사 등이 동의를 표시했고 수찬(현재 파르티잔스크) 등 각지의 한인들이 독립선포 경축식을 가졌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나라를 빼앗긴 지 9년여 만에, 비록 이역만리에 `임시'로 세운 정부지만 광복의 꿈에 부풀었을 당시 동포들의 심정을 상상하며 일단 빈 운동장이나마 사진을 찍고 철수하기로 했다. 노령정부가 출발했던 건물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우수리스크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자동차를 타고 내려오는 2시간 내내 아쉬움이 남았다.
통합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민족의 여망에 따라 그 해 4월 노령정부, 상해정부, 한성정부간의 교섭이 시작됐다. 국민의회측은 통합 임정을 노령에 둔다는 조건으로 원세훈(元世勳)을 전권교섭위원에 임명해 상해로 파견했다. 초기의 교섭은 순조로웠다. 의견접근을 본 상해측은 8월 중순 2명의 위원을 노령으로 보냈다.
이들이 가지고온 협상안의 핵심은 상해와 노령에 있는 기존정부를 모두 취소하고 국내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상해에 통일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의회는 8월30일 의원총회를 개최하고 협상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는 동시에 국민의회의 취소를 선언했다. 임시정부를 표방한지 5개월만에 대의(大義)를 위해 발전적 해체를 한 셈이다.
한성정부에서 총리로 추대된 이동휘와 교통총장이 문창범이 곧 상해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한 직후 상황은 급변했다. 상해측이 약속을 어기고 통합임정은 상해임정을 개조해 수립돼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지리한 밀고 당기기 끝에 한인사회당의 대표격인 이동휘는 상해측 안을 받아들여 11월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국무총리에 취임했다.
그러나 토착 한인사회의 지도자였던 문창범은 끝내 교통총장 자리를 마다하고 노
[항일투쟁현장답사-러시아를가다-11] 노령정부
입력 200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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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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