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은 새벽녘에 이뤄졌다. 지척도, 생사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달려드는 백군(白軍) 기병대의 수는 셀 수도 없었다. 밤새 견뎌야 했던 영하 40도의 혹한과 졸음은 차라리 사치였다. 이젠 필사적으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일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포성과 총성, 고함과 비명은 무려 6시간이나 계속됐다. 이 모든 지옥의 소음이 마침내 멎었을 때 이만역(驛) 일대에는 무려 6백50구의 사체가 뒹굴고 있었다.
이 가운데 45구는 적군에 속한 고려인 의용군, 나머지 6백5구는 백군이었다. 무려 1대 13. 기습을 당한 부대치고는 너무나 놀라운 전과였다. 러시아 인민혁명군 제6연대에 속한 한용운 중대 1소대는 중대장 이하 소대원이 이 전투에서 전멸당했다. 그러나 `고려인 파르티잔(빨치산·의용군)은 죽어서도 총을 쏘는 신비스러운 군대'라는 전설을 낳았다. 1921년 12월4일 현재는 달레네첸스크로 불리는 도시의 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역사는 `이만전투'라고 부른다.
달레네첸스크(이만)는 하바로프스크와 우수리스크의 중간지점, 중·러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다. 취재팀은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한인빨치산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처절한 백병전을 벌여야 했던가. 달레네 강가에서 따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밤새 덜컹대는 시베리아 밤기차 안에서 이 쯤이 이만이겠거니 짐작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새벽녘이 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러시아에서는 어느 도시엘 가나 내전 당시의 파르티잔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거대한 공산주의 실험의 잔재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빨치산 모두를 위한 조형물일 뿐 특별히 한인 빨치산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수리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취재팀은 파르티잔스크에 가 보기로 했다. 거기서는 혹시 러시아혁명에 뒤이은 적백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바친 한인들의 외로운 넋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파르티잔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쪽으로 350㎞ 가량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 4시간이 넘는다. 1972년 이전에는 스찬이라 불렸으며 우리식 지명은 수청(水淸) 또는 소성(蘇城)이라고 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지세가 조국 산천과 닮아 많은 동포가 일찍이 1860년대 부터 정착한 곳이다. 혁명기에는 험준한 산세에 의지해 영웅적인 빨치산투쟁이 전개됐다.
오죽했으면 도시의 이름 자체를 파르티잔스크로 바꿨겠는가. 대관령 못지않은 시호테알린 산맥의 비포장 고개를 넘어가는데 통역 송지나 교수(극동대학 한국학부)가 한마디 잊지 않는다. “재작년에 이 지역에서 사냥꾼들이 시베리아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도 했지요.”
혁명과 내전이 발생하자 연해주 각지에서 한인들이 총을 들고 적군편에 섰다. 그들에겐 조국의 해방과 혁명은 동의어였다. 볼셰비키 또한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조선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가운데 수청지역은 선봉이었다. 러시아군 출신인 한창걸(韓昌傑)을 중심으로 한인 빨치산이 가장 먼저 조직된 곳이 수청이다.
파르티잔스크 지역에서 여러 부대가 활약했지만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것은 김경천(金警天 또는 金光瑞) 장군이 이끈 의용군이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이들의 활약은 `하늘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만주에서 이미 용맹을 떨쳤던 김경천이 수청지방으로 온 것은 1920년 무렵이다.
당시 이 일대는 일본군과 백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들이 한인사회를 무인지경으로 짓밟고 있었다. 김경천은 즉각 의용군 모집에 들어갔다. 다우지미, 석인동(니콜라예프카), 신영동 등 한인마을에 격문을 돌린 결과 창해청년단이라는 조직이 그의 휘하에 이루어졌다. 60여명으로 이루어진 빨치산 부대는 곧 마적소탕작전에 돌입했다.
김경천의 부대는 첫 전투에서 패했으나 이후 승승장구, 그 해 여름 경에는 이 일대에서 마적은 완전히 섬멸됐다. 이 작전으로 김경천의 이름은 시베리아 일대에서 크게 떨쳐졌고, `김장군'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김경천은 수청 일대를 수중에 넣고 군정(軍政)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동아일보 1922년 1월24일자 `노령견문기'에 따르면 한인이건, 중국인이건, 러시아인이건 김경천의 증명서가 없으면 창해청년단의 수비구역 밖으로 드나들 수 없을 정도였다.
혹시나 하고 파르티잔스크 시내의 박물관을 찾아갔지만 역시 김장군의 자취는 없었다. 전시된 사진은 러시아 빨치산 위주였다. 드문드문 한인으로 보이는 얼굴이 눈에 띄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60이 넘은 할머니 관장의 호의로 문서더미를 뒤져 1900년대 한인관련 기록을 겨우 열람할 수 있었을 뿐이다. 1937년 스탈린이 이 곳 한인들을 강제이주시키지만 않았어도 한인빨치산의 역사는 그런대로 전승됐을 지도 모른다.
내전 기간 동안 얼마나
[항일투쟁 현장답사 러시아를가다-12]韓人들은 죽어서도 총을쏜다
입력 200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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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2-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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