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살기 힘드는 지 모르갔소.” 파르티잔스크에서 나홋카 방향으로 가다가 만난 노점상 아주머니는 한인 3세였다. 97년 중앙아시아로부터 이 곳으로 되돌아와서 어렵사리 농사를 지었는데 2년 연속 수해를 입어 망했다고 한다. 하루종일 도로변에서 그나마 건진 야채와 과일을 내놓고 팔지만 여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는 하소연이다. 수박을 건네주는 아주머니의 손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갈라지고 터져 있었다.

지난해 9월 핫산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의 현장을 찾아다니는 동안 취재팀은 힘겨운 삶을 호소하는 러시아 한인 후손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하소연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정확히 밝혀내고, 그들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감싸줄 때 아직 완결되지 못한 독립운동이 마무리지어지는 것은 아닐까.

러시아 적백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기우는 1922년 말부터 러시아 내에서 한인들의 항일 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만주로 이동하지 않은 한인 무장세력은 이제 총을 놓고 연해주로 돌아가 농부, 광부, 어부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파르티잔스크 핫산 하바로프스크 등에 한인사회가 재건됐다. 이들은 신한촌등 집단주거지를 중심으로 조국에서 가져온 문화를 공유하며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26년엔 우수리스크 보로실로프가에 고려교육전문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됐고, 36년엔 블라디보스토크 중심가에 고려사범대학이 세워졌다.

그러나 연해주 한인들은 1937년 또한차례 비극적 대이동에 내몰리게 된다. 스탈린이 연해주의 한인을 남김없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인들이 일본인과 닮아 일본의 스파이를 색출하기 힘들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스탈린의 속셈에는 근면·성실한 한인들의 강제이주를 통해 중앙아시아를 개간하려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다.

한인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자기가 살던 도시의 역으로 끌려나왔다. 이들은 창문도 없는 화물열차를 타고 수개월에 걸쳐 `죽음의 여행'을 시작했다. 빽빽히 화물칸에 실린 이들은 어디쯤을 달리고 있는 지도 왜 끌려가는 지도 모르는 채 중앙아시아를 향해 달렸다. 숨막히는 화물차 안에서 노인들과 어린아이들이 잇따라 숨져갔다.

간신히 도착한 중앙아시아의 상황은 더 비참했다. 그들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한인들은 토굴을 파고 한 해 겨울을 나야했다. 토굴속에서도 수많은 한인들이 숨을 거두었다. 특히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10명에 1명이 지독한 감기 등 질병으로 숨졌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고통을 딛고 일어선 한인들은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근면으로 새 삶을 일궈냈다. 이전에는 기후와 풍토상 물이 부족해 이뤄지기 힘들었던 쌀농사를 시작했다. 엄청난 길이의 수로를 파서 물길을 대고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2차대전 기간 중 중앙아시아 한인들이 쌀과 면화 등의 증산왕을 차지하면서 훈장을 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 한인들의 문화는 고스란히 중앙아시아로 옮겨갔고, 연해주는 러시아인의 땅이 돼 버렸다.

요즘 연해주에는 중앙아시아로 갔던 한인들의 후손이 위태로운 정정과 경제난을 피해 되돌아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5천여명, 우수리스크에 3만여명이 돌아왔으며 이 숫자는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할아버지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왔어도 이제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연해주에 그들이 정착할 곳은 없다.

90년 한·러 수교 이래 한국으로부터 이들에 대한 지원이 일부 이뤄지기는 했다. 고합그룹 장치혁 회장의 경우 우수리스크에 한인재생기금이라는 건물을 마련해 주고,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에 한국학부 건물을 지어 희사하기도 했다. 장회장은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세워 선친 장도빈선생이 1920년대 독립운동을 했던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쳬계적으로 연구토록 하고 있기도 하다. 연해주 주당국으로부터 임차한 9개의 병영을 되돌아오는 한인들의 보금자리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을 하는 민간단체도 있다. 그러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여전히 많은 한인후세들이 감자 한 알로 하루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는 얼어죽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말기 폭압과 학정으로 인해 `자기 땅에서 유배 당한 자들'과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고 목숨을 내던져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 아니던가. 이들을 내버려 두는 한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이들을 도울 방도를 체계적으로 수립해야 한다.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다시 쓰는 작업은 그 일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글=梁勳道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