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임시정부가 1945년 1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머물렀던 중경시 유중구 연화지 38호. 1995년 현지에 복원된 이 건물은 당시 중국 국민당과 미주 동포들의 후원이 급증했던 것을 증명하듯 옛모습 그대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시 이곳 중심가 여관이었던 것을 1년에 40만원을 주고 임대, 사용하였다 하는 이 건물은 임시정부 관련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 외에 1호부터 4호까지 별도의 사무실로 꾸며져 있는데 내무, 재무, 판공실 등의 규모로 보아 짜임새를 완전히 갖추었던 임시정부의 조직을 엿볼 수 있다.
중경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도 있었다. 중경시 남구 추용로 37호 1층은 현재 `미원'이라는 국영음식점으로 개조, 사용중이었다. 조상들의 체취를 더듬고자 2, 3층 건물 내부로 들어가자 나무썩는 고약한 냄새가 취재팀을 반겼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나섰던 우리네 조상들의 숨결은 오간데 없고 건물내부가 삭막하게 스러져가고 있다.
양자강 상류쪽 토교에 임시정부의 대가족이 살고 있는 동안 하류쪽에 있는 남안구 탄자석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과 그 가족들이 살았다. 손가화원(孫家花園)이 있던 자리가 군수품 보급창고로 바뀌어 취재팀의 근접이 불가능했다. 이곳에 상하이 시절 임시정부 군무위원을 지냈던 민족혁명당 당수 김규식과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김원봉 등이 거주했다.
“중경 생활이 정말 어려웠어요. 제가 어릴 때 밥 한끼 제대로 먹은적이 없었어요. 만약에 손과화원이 아니고 다른데 였다면 굉장히 굶주린 생활을 했었을 겁니다. 다행히 손과화원이라는데가 복숭아다, 포도다, 또 무화과, 배 없는게 없었어요. 그런걸 돌아가면서 많이 따먹으며 배를 채우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김정륙(76·임정요인 김상덕의 아들)의 증언이다.
토교든 남안이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의 생활은 한결같이 어려웠다. 생계수단이 전혀 없는데다가 당시에는 중국 사람들도 살아가기 몹시 힘든 때였다. 김구의 꾸준한 노력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 임시정부 활동비와 요인 및 가족들의 생계비로 매달 6만원씩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남안에서 민족혁명당 인사들의 자취를 더듬고 있는 동안 이곳을 안내한 이선자씨(李鮮子·중경시 한국임시정부 박물관 부관장)가 취재팀의 소매를 잡아 끈다. 도로를 닦는 노동자들이 무더위속에 반듯한 경계석을 쌓고 있는 모습을 지나쳐 택시로 30여분 달려 도착한 화상산 공동묘지. 쓰레기 산이다.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이 죽으면 이곳에 묻었다 한다. 수만톤 넘게 높다란 쓰레기. 중국정부의 배척인가, 우리 후손의 무지몽매함인가. 독립의 염원을 안고 이국에서 쓰러져 갔던 이름모를 우리네 조상들 그리고 무덤. 그 땅뙤기 조그만 했다던 이곳이 쓰레기 산으로 흉측한 모습이라니. 근처에 들국화만이 애처러움을 달래는 듯 지천으로 피어있다. 조상들에 대한 부채감에 취재팀의 고개는 자꾸만 땅으로 떨구어 졌다.
진시황제와 양귀비 유적으로 유명한 섬서성의 성도 서안이다. 중경을 떠나 꾸불꾸불한 산길을 내려보며 비행기로 50분 걸려 도착한 이곳. 밀밭으로 평원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옛부터 곡창지대였음을 짐작케 한다. 5천년 역사의 도시 이곳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전방공작과 특무활동을 위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 200여명을 받아들여 광복군5지대를 편성했는데 사실상 이들이야말로 초기 한국광복군의 주력부대라 할 수 있다. 서안은 이 시절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겨레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시내에서 50일 떨어진 이곳 흥교사에는 당나라때 인도로 불경을 얻으러 갔던 현장법사의 유골과 그의 제자인 신라때 고승 원측의 사리가 모셔져 있다. 흥교사에서 남쪽으로 30일 떨어진 종남산 고찰에서도 신라때 고승인 의상대사가 10년간 머물면서 화엄종을 연구했다. 지금도 이 작은 절에서는 그를 기억하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을 자신들의 통할지휘 하겠다는 뜻을 통보해 왔고 임시정부는 어쩔수 없이 수락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구미외교위원회를 워싱턴에 설치하는 등 끊임없이 망명정부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비행기들은 전혀 무방비 상태에 있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했다. 항만내에 정박중인 미국 함정들을 비롯해서 비행장과 해군 병참이 수시간동안에 완전히 파괴됐다. 한국임시정부는 다음날 일본에 대해 즉각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일본을 뒤따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에 맞서 세계 26개국은 연합국을 형성했다. 그동안 눈에 가시 같던 존재였던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반신불수로 만든 일본은 이제 마음놓고 동아시아 일대를 파죽지세로 공략했다.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신
[항일투쟁 현장답사-임시정부] 광복군 활동과 태평양 전쟁
입력 2000-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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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7-2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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