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세상을 떠난 한나라당 諸廷坵의원은 재야에서는 민주화에 헌신하고, 도시빈민 등 소외계층의 대변자로서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낸 순수한 영혼이었다.

또 제도정치권에 입문해서는 야당 투사로서 강렬한 이미지를 내보이면서도, 의원 본연의 의정활동을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한 「국회의원」의 귀감이었다.

諸의원은 군부독재와, 2金지역할거 정치에 대해서는 투철한 민주주의관을 바탕으로 한 투쟁을 벌였고, 국리민복과 관련된 의정활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박애주의적 입장에서 의정활동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칼날같은 소신과 따사로운 정을 함께 겸비한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1944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諸의원은 6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 학생운동에 뛰어든 뒤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고,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 시절내내 당국과 「숨바꼭질」을 하는 등 오랜 고난과 시련의 세월을 보냈다.

그는 77년 판자촌에서 만난 정일우신부 및 서울 양평동 철거민들과 함께 지금의 시흥시에 「복음자리」 마을을 건설하는데 앞장섰고, 80년대초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를 결성, 목동과 상계동 등 강제철거 대상 빈민촌을 중심으로 빈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가 86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것도 이같은 공로때문이었다.

한겨레민주당공동대표로 13대 총선에 출마했다가 한 차례 고배를 마신 諸의원은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후 그는 「깨끗한 정치를 위한 자정선언」을 주도했고, 95년 9월 국민회의 창당으로 통합민주당이 갈라질 때 민주당에 잔류한데 이어 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사실상 집권여당이었던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을 통해 탄생한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이 대목에서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재야인사로서 정권교체에 몸을 싣지 못한 점에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諸의원은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집단을 찾았고 결국 고뇌끝에 한나라당 합류를 결정했다.

사실 諸의원은 이같은 소신 정치로 말미암아, 제도권 정당의 틀에서는 늘 소수의 입장에 서왔다.

재야 출신 정치인으로서 그는 폐암이라는 병마속에서도 의연함과 성실함을 잃지않았다. 특히 지난해 정기국회 국정감사때는 꼬박꼬박 서면질의서를 내며 「병상국감」을 펼쳐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또 자신을 돕기위해 재야 출신의원들이 작년 12월 「제정구의원 투병을 격려하는 후원의 밤」 행사를 열었으나, 그는 『의정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마당에 무슨 후원회냐』며 사양했고, 끝내 후원회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尹寅壽기자·isy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