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헌절인 17일 오전 홍수경보가 해제돼 차량 통행이 제기된 여주대교에서 주민들이 수위가 점차 낮아지는 다리 상판을 바라보고 있다. /김종택기자·jongtaek@kyeongin.com

 “이젠 살았다, 34년전의 악몽에 시달린 24시간이었어요.”
 범람위기에 몰린 남한강 여주대교를 바라보며 밤새 뜬눈으로 지샌 여주읍 주민들은 17일 새벽녘이 훤하게 밝아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둑방을 무너뜨릴듯한 기세로 달려드는 황톳물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주민들은 지난 1972년 침수사태의 악몽이 떠올라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16일 새벽 경기지역에 호우경보가 발표됐지만 충주댐이 초당 3천t을 방류할 때만해도 여주군민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전 6시께 충주댐이 방류량을 초당 5천t으로 늘리고 오전 9시를 기해 여주대교 지점에 홍수주의보가 발효되면서 차츰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께, 남한강 인근 북내면 외룡리 하천 둑이 10m 가량 유실되고 피서객 고립과 구조작업이 잇따르면서 여주군재난안전대책본부 상황실이 급박해졌다.
 이 무렵 7.5m(경계수위)에 머물던 여주대교 수위가 급상승해 오후 4시 9.5m(위험수위)를 넘어서 홍수경보가 발령되자 여주군은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이어 오후 9시, 집중호우로 유입량을 감당하지 못한 충주댐이 방류량을 초당 9천t으로 늘리면서 이 물이 도달하는 17일 오전 1~2시가 최대 고비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당시 여주대교는 상판 밑바닥까지 물이 차 있었고, 일부 소하천은 역류로 주변 농경지 침수가 시작됐다.
 범람시점이 임박해지면서 여주군은 자체 회의를 통해 여주대교 수위가 둑 높이 11m에 육박하는 10.5m를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대피 안내방송에 들어가는 등 긴급 주민대피령 준비에 착수했다.


 남한강이 범람할 경우 여주읍 5천700여가구가 침수돼 1만6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침수지역이 능서·흥천·금사·대신면 저지대로 확산되면 이재민이 2만명을 넘어설 상황이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김문수 도지사도 자정께 여주군청을 찾아 직접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한강홍수통제소와 수자원공사에 수차례 전화를 걸어 방류량 감축을 간곡히 요청했다. 17일 새벽 3시를 전후해서는 여주대교 수위가 9.9m까지 올라 대피령을 발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높아졌다.
 다행히 충주댐측은 17일 오전 2시가 넘자 방류량을 초당 8천t으로 줄였고, 여주대교 수위도 9.9m를 정점으로 완만한 하향세로 돌아섰다.


 이날 오전 10시께에는 수위가 9.3m로 떨어지면서 홍수경보가 18시간만에 홍수주의보로 대체발령됐고, 그제서야 주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1972년 최악의 침수사태를 겪은 여주 남한강은 1990년과 2002년에도 수위가 각각 10.17m, 10.2m까지 상승했고, 매년 집중호우 때마다 10m에 육박하는 아찔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기수 여주군수는 “언제까지 충주댐만 바라보며 가슴을 졸일 수 없지 않느냐”며 “우선 남한강 둑을 보강하는 것이 시급한데 군 재정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어 국가하천을 관리하는 정부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