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국립극장서 열린 광복 29주년 기념식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저격했지만 육영수 여사가 피격돼 사망했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은 당시 동족이면서 적대관계인 남과 북, 거기에 숙적인 일본이 엮인 삼각관계의 '흉사'라는 점에서 진상규명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일양국 모두 사건후 100일 이상을 수사했지만 결론이 크게 달랐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한국 측은 북한의 조종에 의한 범죄라고 본 반면 일본 측은 '남한내 혁명을 위한' 망상에 사로잡혔던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더욱이 저격범 문세광이 사건 직후 체포돼 128일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더는 말할 수 없기에' 실체적 진실규명은 이미 물건너 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그럼에도 국내의 여러 사가들은 이 사건이 육영수 여사 절명이라는 현실이외에, 특히 한일 양국이 서로 정략적으로 이용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1973년 8월 당시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위기에 처했던 박정희 정권이 이른바 문세광 사건을 계기로 돌파하려 했으며, 일본측도 분명한 실체 규명보다는 정략적인 타협을 택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사건 직후 일본 측은 납치사건의 범인을 주일 한국대사관 김동운 1등 서기관 등 일당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박 정권이 그 배후라고 지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박 정권은 납치 자체가 실패한 것도 큰 충격이었지만 범행 일체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국제적으로 도덕적 위기에 몰리게 됐다는 점에서, 특히 일본에게는 '낯을 들 수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이게 바로 한일 양측의 '거래'가 시작되는 배경이다.

그런 상황에서 1974년 8월15일 저격범 문세광에 의한 박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직후 저격범이 문세광이라는 재일 한국인으로 요시이 유키오라는 이름의 일본여권 소지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노신영 외무부 차관은 우시로쿠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일본측이 일본인도 아닌 문세광에게 일본 여권을 발급해준 것은 분명히 일본측에 하자가 있다”며 발급 경위를 추궁한다.

한국 측의 '강공'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당시 일본 측은 '재일 한국인의 범죄로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도의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한국 측은 들끓는 반일감정을 내세우며 김종필 국무총리까지 나서 일본을 몰아붙였다.

이례적으로 박 대통령까지 나선다.

그 해 8월30일 박 대통령이 우시로쿠 대사를 불러 사실상 '단교 위협'에 가까운 대일 강경조치를 전했다. 그 내용에는 이른바 문세광 사건을 대하는 일본측의 태도로 우방국 여하를 판단하겠으며 일본 측이 성실한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한일간 기본조약도 재고할 수 있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일국의 대통령이 일개 대사를 부른 것은 극히 드문 일로 통상적인 외교경로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측은 양국관계를 우려, 한국 측 요구대로 자국내에서 문세광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수사결과, 그 내용이 한국 측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세광에 대한 사형 집행을 이유로 수사를 영구미제로 남겨둔 채 서둘러 종결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한 주일 한국대사관의 김동운 1등서기관에 대한 수사도 벌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