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시 보개면 기좌리에서 민간인 집단학살이 벌어졌고, 여전히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아있을 거란 증언이 지난달 경인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보도됐다.

한국 전쟁 발발 57년.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경기도 곳곳에는 억울하게 스러져간 수많은 영혼이 말없이 묻혀 있다. 서슬퍼렇던 군사독재와 숨가쁜 개발에 밀려 그들의 희생엔 한 점 빛조차 들지 않고 있다. 경인일보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한국전쟁 당시 도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중 유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들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사암리. 발전을 거듭하는 용인의 다른 지역과 달리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닿은 지역이다. 사암리엔 일제가 뚫었다는 대명광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때 500명 이상의 광부가 일한 수도권 대표 금광이다.

대명광산은 또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광산 일대에선 여전히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간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 부역자학살이 벌어졌다는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의 비둘기굴. 굴 앞에는 일제가 개발한 광산의 흔적이 깊은 웅덩이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전두현기자·dhjeon@kyeongin.com
지난달 17일 오전 11시께, 사암리 용인시농업기술센터. 비포장길을 따라 센터 뒤쪽 야트막한 야산에 오르자 주민들이 '비둘기굴'이라고 부르는 동굴이 보였다. 굴 입구는 어른 두어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이였고, 굴 앞에는 옛 금광입구가 웅덩이로 변해 남아있었다.

비둘기굴은 굉장히 길다고 하는데 20가량 들어가자 돌무더기로 막혀 있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픽 참조>

주민들에 따르면 1·4후퇴를 전후해 이 동굴 안에서 부역자 집단학살이 벌어졌고, 유족 몇 명만이 숨진 희생자의 시신을 회수해갔다.

이날 확인한 동굴 바닥은 천장에서 떨어진 돌과 흙이 쌓여 단단히 굳어진 상태였다. 회수되지 않은 나머지 시신들이 그대로 묻혔다면 이 동굴엔 당시 희생자들의 유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굴 외에 다른 곳에도 유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1960년대 광부로 일했던 이 마을 주민 박동선(60)씨가 대량으로 유골을 발견한 장소다.

 
 
박씨는 "땅을 파다가 유골이 계속 나와서 추려보니까 가마니 3개가 가득찼다"며 "윗사람들이 근처 야산에다 유골을 묻은 뒤 막걸리를 따라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 자리가 어딘지는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중장비로 땅을 파다 발견했다면 온전한 형태의 유골이 아닌 다른 유골과 마구 섞인 상태였을 터. 적어도 한 두 명의 유골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유골을 파낸 곳은 현 농업기술센터 바로 앞 지점. 전쟁 뒤 금 채굴을 재개하기 위해 뚫었다는 광산입구가 있던 곳이다.

광구는 지름이 4 정도로 깊이 150에 30마다 남북으로 갈라져 갱도는 원삼면 지하에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현재 갱도는 물이 찬 상태라고 한다. 박씨는 "레일도 철거하지 못한 채 광산을 폐쇄해 밑으로 내려가면 예전 모습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해 희생자들의 유골존재 가능성을 시사했다.

원삼면의 학살규모는 치안대원이었던 김상엽(79·가명·원삼면 삼계리)씨에게 들을 수 있었다. 김씨는 "난 학살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치안대원들은 부역자 등을 그냥 광구 속으로 밀어넣어 죽였다"며 "원삼면에서만 400명이 죽었다는 얘기가 여지껏 전해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