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포시 하성면 야산에서 어머니 무덤을 찾은 김순창(가명)씨가 묘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 무덤은 1950년 11월 희생된 민간인 7~8명이 함께 묻혀있는 이른바 '공동무덤'이자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가 확실하게 남아있는 곳이다. /전두현기자·dhjeon@kyeongin.com
핏줄을 나누지 않았는데도 같은 무덤을 관리하고, 같이 성묘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왜 같은 곳에 묘를 썼을까.

지난 달 25일 오후, 김포시 하성면 석탄1리의 한 야산. 풀이 거의 자라지 않은 산 자락의 무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김순창(69·가명)씨의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의 어머니는 40대였던 지난 1950년 11월 초 마을 청년단에게 희생당했다.

김씨는 "이 부근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무덤 안에 계시다는 걸 안 건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초등학교 동창 사이인 강정순(68·여·가명)씨의 어머니(당시 38)와 언니(〃 18), 여동생(〃 8)도 이 무덤에 잠들어있다. 강씨 가족들도 비슷한 시기에 희생당했다. 강씨는 "원래 골짜기였던 이곳에 희생자 7∼8명이 뒤엉켜 있어 그냥 흙을 밀어넣고 무덤처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무덤이 하나라 김씨와 강씨는 5년째 함께 무덤을 관리하고 있다. 강씨는 "우리 말고 다른 유족들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면서 "주위에 가시나무 덩굴이 있고, 풀과 나무도 많은데 이상하게 무덤 주위에만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태산가족공원 안쪽에도 비슷한 무덤이 있다. 10여년 전 이곳에서 목장을 했던 정모씨가 작업 중 한무더기의 유골을 발견, 합장했다고 한다. 이 무덤자리도 원래 '가재골'이라 불리던 골짜기였다. 장운성(67·가명)씨는 "인민군 점령시 구장을 맡았던 사람들이 청년단에 끌려갔고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며 "아버지를 잃은 나를 비롯해 이곳에 가족이 묻혀있다고 생각한 9명이 4년 전 위령비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 무덤을 함께 쓰는 유족들은 치안대에 가족이 끌려간 1950년 10월 20일을 똑같이 기일로 정했다.

하성면에서 만난 유족들에 따르면 그해 10월경 마을 곳곳에서 청년단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석탄리 한강변과 현 태산가족공원 자리, 하성초등학교 뒤쪽 등이 대표적인 학살지로 학살규모는 수백 명에 이른다. 태산은 인민군 주둔지였기에 인민군이 퇴각한 뒤 부역혐의 희생자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이 전쟁 중 입수한 '북한군 전투명령 지령'은 태산에 인민군본부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한 건 그 많은 유족들 중 단 한 명 뿐이다. 대부분 당시 일을 쉬쉬하며 이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제발 가명을 써야 한다. 가슴에 묻어뒀던 말을 털어놨지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불안하다"는 강씨의 말처럼 유족들은 여전히 57년전의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