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를 앞둔 북한 내무서원 등은 공무원·군경가족·지역유지 등 군 관내 주요 인사들을 철사로 묶어 떠드렁산 옆 모래톱으로 몰았다. 이들은 줄줄이 파놓은 긴 구덩이 앞에 사람들을 늘어서게 한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구덩이로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대검과 죽창으로 마구 찔렀다. 휘발유를 뿌리고 불까지 지른 뒤 흙으로 덮어버렸다.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여명. 단일 민간인학살사건으로는 경인내륙지역 최대규모로 알려졌다. 이름하여 '9월 양평 대학살'이다.
지난달 23일 오전 11시 양근대교 옆에서 만난 김유택(77·전 양평문화원장)씨는 처참했던 학살 현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어 "우리 형도 잡혀갔지만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며 양근대교 교각 옆을 가리켰다.
양평문화원은 지난해 6월 학살을 잊지 말자며 비석을 세웠으나 정확한 학살 지점은 1973년 팔당댐이 생긴 뒤 수면 아래로 잠긴 상태다.
학살지가 물 속에 잠기면서 김씨의 장인을 비롯,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한 많은 희생자들도 함께 잠겨 버렸다.
이날 오후 양평복지회관에서 만난 박대식(84)옹은 학살지까지 끌려갔지만 강으로 뛰어들어 살아남은 사람이다. 박옹은 "철사로 팔을 묶기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날 묶을 차례에서 철사가 모자랐다. 내무서원이 철사를 가지러 간 사이에 도망치다 다리에 총알을 7발이나 맞았다"고 당시의 악몽을 떠올렸다.
박옹은 "600여명이 죽었다고 하지만 1천명이 넘을 수도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 4월 진실화해위원회는 양평 대학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인민군 등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 즉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로 규정됐다. 하지만 일각에선 양평의 학살 중 적대세력 학살은 일부일 뿐이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양평은 인민군의 퇴각로였고,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던 몽양 여운형의 고향이기에 부역자학살이 더 심했다는 것.
주민 김성남(40·가명)씨는 "적대세력학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여러 어른들은 부역자학살이 더 광범위하게 자행됐다고 말한다"며 "좀 더 면밀한 양평지역 민간인학살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