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엔 고려궁지, 강화산성, 홍릉(이상 강화읍), 가릉, 석릉, 곤릉(이상 양도면), 각종 국방유적 등의 고려 유적이 있다. 또 강화의 대표적인 산 중에는 '고려산'도 있을 정도다.
정부는 이미 1970년대에 45억원이란 예산을 직접 투입해 강화의 유적지 복원과 보수공사를 벌인 바 있다. 그만큼 역사적 보고인 강화에 대한 정부의 기대가 컸다는 의미다. 또 1998년부터는 정부와 강화군이 5개년 계획으로 152억원을 들여 삼랑성, 강화산성, 외규장각, 고려왕릉, 선원사지, 5진 7보 53돈대의 국방유적 보수공사를 펼치기도 했다.
고려궁지는 사적 133호로 지정돼 있으나 아직 정확한 위치에 대해선 전문가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또 강화성은 고려시대의 성으로 몽골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하던 1232년 6월 최우가 축성을 시작했으며, 내성·중성·외성 등으로 구분해 지었다. 이 안엔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물을 개성 송도의 것과 비슷하게 건립했다고 한다.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성을 쌓을 때 강화해협을 따라 장성으로 요새를 축조했다. 이를 1618년 외성을 보수했고, 1658년(효종 9년)엔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후 계속해서 각 돈대가 설치됐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이 곳 강화가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되기도 했다. 고려 고종대에는 이궁(행궁·별궁)과 가궐도 지었다. 마리산을 배경으로 하는 흥왕리엔 이궁지가 있고, 삼랑성에는 가궐지가 있다. 또 신니동 가궐지도 있다. 이 중 삼랑성 가궐은 1259년 백승현의 풍수설에 따라 조성됐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강화가 고려의 왕도역할을 한 것은 1232년(고종 19년)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39년 동안이다. 따라서 강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왕은 고종(23대)과 원종(24대)인 셈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관련성은 그 이전인 21대 강종, 22대 희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강화에는 고려 왕과 왕비의 능이 있는데, 이는 전쟁을 치른 군주로서의 존재와 그의 활동, 그리고 전후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는 정치·문화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런 다양한 문화재가 강화지역에 집중돼 있었지만 그에 걸맞는 국가 차원의 지원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다시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
정부가 이제라도 강화에 국립 고려문화재 연구소를 설립한다면 이는 강화가 남북을 하나로 잇는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인천 강화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특구로 지정돼도 전혀 손색이 없는 지역"이라면서 "반드시 고려문화재 연구소를 유치해 인천의 유구한 역사성을 되살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