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주시 무건리 종합사격장 근처에 나부끼는 현수막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하는 주민들의 억울함은 사격장에 쏟아지는 포탄 소리에 묻혀버렸다. /최재훈기자·cjh@kyeongin.com
"나라에서 나가라니 어쩔 수 있나. 억울해도 힘이 없으니…."

지난 17일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종합사격장 옆에서 만난 한 주민의 힘없는 목소리다. 파주지역 1천651만㎡를 훈련장으로 사용하는 국방부는 지난 1998년부터 법원읍 직천리와 오현리 전 지역을 종합훈련장 부지로 수용하고 있다. 이 지역 주민 200여 가구 600여 명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고향을 등져야 할 상황이다.

국방부 계획대로라면 오는 2012년까지 주민들은 모두 이주해야 하지만 "국내 최대의 종합훈련장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면서 토지거래는 멈췄다.

땅값도 바닥이 안 보이게 급락, 주민들이 이주해야 할 인근 법원읍 가야리 등의 땅값과는 5~6배 차이가 난다.

사격장의 소음과 오폭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주민들은 결국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우리 정부는 미군기지가 이전하는 평택시에 오는 2012년까지 18조8천억원을 지원해 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

과거에도 평택에는 미군기지가 있었지만 이번 보상은 미래에 입게 될 피해를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군사시설과 훈련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온 경기북부 접경지역 주민들에 대해서는 50년 넘게 눈을 감아왔다.

일본은 우리와는 다르다. 1952년 군사시설 주변 주민들의 피해보상 근거를 만들었고, 1974년에는 '방위시설주변의생활환경정비등에관한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은 자위대와 주일 미군에게 똑같이 적용되며, 법 제정 목적 자체가 군사시설로 피해를 보는 주민들의 보상을 위해서다.

우리의 경우 지난해 9월 국방부가 유사법안을 통합해 입법예고한 '군사기지및시설보호법(안)'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되면 현 민간인 통제선은 군사분계선 남방 15㎞에서 10㎞로 줄어들고, 군 작전 등으로 활용 불가능한 토지에 대한 매수청구권도 생긴다. 군 협의 결과에 이의가 있을 경우 상급위원회에 재심 청구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군사분계선 인접 제한보호구역을 25㎞에서 15㎞로 축소해야 한다'는 경기도의 건의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할 부대의 보호구역심의위원회에 지자체 공무원이나 민간인 전문가, 주민 등의 참여도 배제했다. 이름부터 군사기지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서 그럴까.

여전히 군이 우위에 있는 민·군관계 모형에 따라 지역주민을 관리하겠다는 발상이 묻어 나온다. 오히려 지난 9월 7일 고조흥 의원 등 21명이 의원 입법발의한 '군사기지주변지역지원특별법'이 조속히 제정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허훈 대진대학교 교수는 올해 초 펴낸 '군사시설 보호구역 내 피해사례 및 개선방안'이란 연구자료에서 "이제는 국가가 나서서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해 온 지역을 위해 합리적인 보상을 해야 한다"며 "군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국민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