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수(경인플러스 부장)
1865년 당시 영국 최고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웨스트민스터에서 출마해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출마 권유를 받은 밀은 전대미문의 공개장을 발표한다. "첫째, 나는 의원이 되고 싶지 않다. 둘째, 출마하면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을 것이다. 셋째, 당선된다 해도 내 시간과 정열을 선거구를 위해 바칠 수 없다. 의원은 선거구에서 선출되지만 전 국민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200여년 전 영국은 부정선거 천국이었다. 유권자의 표를 공개적으로 매수하는 수집상이 있어 표 값은 주식처럼 등락했고, 유권자들은 자신의 표를 맥주 한 통이나 현금으로 교환했다. 당연히 의원직이 명예로울 수 없었다. 밀이 첫째, 둘째 내용을 공개 선언하고 이상 선거를 감행한 이유이다. 밀은 세 번째 약속도 지켰다. 그는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한 첫 번째 영국 의원이었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쥐고 있는 지역구 유권자의 민원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적 신념을 입법하는 데 매진한 것이다.

우리 정치 현실은 아직도 돈 선거의 미망에서 완전하게 깨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맑아진 건 사실이다. 영국처럼 돈 선거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뼈저리게 경험한 탓이다. 이제 공천헌금을 받고 비례대표를 나누어 주었던 암묵적 관행을 내놓고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50배 과태료와 같은 법적 장치와 유권자 의식의 성숙으로 더 이상 공공연한 돈 선거는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지역구와 지역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총선에서 서울 지역 국회의원 후보들은 여야 구분없이 뉴타운 건설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서울 출마자들뿐 아니다. 총선 출마 후보자들의 공약은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다. 도로 확장, 새로운 도로와 교량의 신설, 특목고 유치, ㅇㅇ지구 지정, ㅇㅇ타운 건설, 노인정 증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설치 등등. 거대 개발 계획에서부터 동네 소공원 환경미화에 이르기까지 한도 없고 끝도 없다. 하나같이 입법과 관계가 없는 일이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우리가 구태여 기초와 광역을 구분해 지방자치를 실시할 이유가 없다.

지역주의에 볼모로 잡힌 정당들의 공약들도 심각한 국력낭비를 초래했다.

지역마다 공항과 항만을 건설하고, 교통량과 상관없이 고속도로를 뚫고 고속철도를 깔고, 공장 없는 공단을 조성한 것이다. 경상도와 호남을 동시에 배려해야 하니 국가 차원의 자원 집중이 불가능하다. 이 모든 일을 정당들이 공약이랍시고 앞장서 벌였다.

이제 국회의원들, 정당들이 국리민복 실현을 위해 보다 큰 가치와 신념을 지향해야 한다.

지역구와 지역의 볼모로 잡혀 정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재선, 삼선이라는 사익을 챙기는 행태로는 절대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국민의 기본권, 국가 진로, 남북통일, 개발과 환경보전, 외교노선, 국가의 품격 등 거대담론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과 신념이 있어야 마땅하다.

이런 관점에서 수도권 국회의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수도권은 지역성이 희박하다. 특히 대도시 권역의 경우 국회의원의 본적이 문제가 안 된다. 유권자들이 각 정당과 인물 중심으로 투표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정치인들은 지역구와 지역주의에서 그만큼 홀가분한 셈이다. 얼마든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국가와 국민 차원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동안 수도권 정치인들은 지역패권주의 정치의 들러리 역할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수도권 18대 국회의원들이 200여년 전 존 스튜어트 밀처럼 '우리는 전 국민의 대표'라고 선언하기를 바란다. 의석의 3분의 1이 넘는 의원들이 바뀌면 한국 정치가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