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 후에도 고통은 계속됐다. 복학은 했지만 불면증에 컴퓨터만 켜 놓은 채 토막잠을 청하는 것도 고역이었고, 신경질적으로 변한 성격으로 78㎏이던 몸무게는 65㎏으로 줄었다. 어렵사리 졸업은 했지만 정작 전공인 일본어는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평해전은 사람들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아니, 오히려 껄끄러워했다. 생계전선에 내몰린 그에게 회사 면접관들은 서해교전을 전쟁소설 따위로 치부했고, 심지어 패전론을 운운하기도 했다. 전공과 무관한 전자서비스와 CNC선반, 물류·장비회사에서 박봉을 견뎌가며 일했지만, 퇴화된 민첩성과 기억력으로 직장마다 8~9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폐에 기흉이 생겨 기껏 모은 돈마저 수술비로 날렸다. 부상 후유증 탓. 고민 끝에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단 5분만의 심사끝에 각하됐다. 배는 쳐다보기도 싫은데 해군은 그에게 부사관 근무를 취업 알선책으로 내놨다. 원형탈모증 환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한다는 뉴스에 오기가 생겨 지난 4월 재신청을 했지만 가슴 한 켠은 여전히 아려온다.
그런 고씨에게도 예비군 통지서는 여전히 날아온다.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느냐"고 묻자 "하나둘씩 빠지면 예비군은 누가 하냐"고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