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곡물값이 폭등하면서 식량 위기의식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종자 확보와 개발의 중요성이 부각된 게 오래 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자시장은 이미 외국자본에 점령당했다. 매년 수백억원의 로열티가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종자 주권'마저 잃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내년 국제식물신품종보호동맹(UPOV)의 협약 확대를 앞두고 국내 종자시장의 위기 실태와 대응방안을 진단한다.

<편집자 주>

"종자회사 보고 농사 지을 여유가 있남? 우리 종자건, 남의 종자건 품질 좋고 잘 팔리면 되지."

24일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에 있는 한 종묘가게. 33㎡ 남짓한 가게 안은 200여종의 각종 씨앗으로 가득하다. 내달 중순 배추, 무, 총각무 등의 파종을 앞두고 몰려드는 농민들로 주인 정모(60)씨는 숨돌릴 틈도 없다.

정씨는 7곳의 종묘회사로부터 채소종자를 받고 있다. 이 가운데 60% 이상은 세미니스, 흥농종묘, 사카타 코리아 등 외국기업 제품이다.

'우리 종자가 있느냐'는 말에 정씨는 다소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진열대를 뒤지더니 "있기는 하지만 잘 안나가. 우리같은 장사치야 잘 팔리는 제품을 갖다놓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어?"라며 몇 개를 올려 보인다.

이 가게를 찾는 농민들도 국내 (회사가 만든)제품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무, 배추, 고추 등을 주로 재배한다는 농민 김모(59·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씨는 "비싸도 품종좋고 돈 많이 벌어주는 놈이 최고지"라고 말한 뒤 "그래도 우리 종자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개발해야 하는데…"라며 씁쓸해 했다.

 
 
▲ 다국적 기업의 국내 종자시장 장악으로 국내 기술로 개발된 토종종자를 시장에서 찾아보기는 이제 어려운 일이 됐다. (사진은 24일 수원시 팔달구 영동시장의 한 종묘가게).
/하태황기자 hath@kyeongin.com
국내 종자업체들이 외국 자본에 힘없이 쓰러지면서 종자주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관련기사 3면> 농수산식품부와 한국종자협회,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민간 업체들이 주도하고 있는 국내 채소종자 시장 규모는 1천500억원 정도로, 이 시장을 두고 무려 124개 업체가 생존을 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매출기준 '빅5' 종자회사 가운데 국내자본 기업은 (주)농우바이오, 코레곤 정도만이 명맥을 이어갈 뿐 모두 외국회사가 점령했다.

외국기업의 국내 채소종묘시장 지배는 외환위기를 전후로 본격화했다.

1997년 세계적인 종자기업인 일본의 사카다종묘가 청원종묘(주)를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스위스 노바티스(현 신젠타 코리아)가 서울종묘(주)를 합병했다.

이듬해 다국적 기업인 미국 세미니스(현 몬산토 코리아)도 국내 매출 1위였던 흥농종묘(주)를 합병했다. 흥농종묘는 당시 연 매출이 600억원, 자산가치만도 4천500억원에 달할 정도로 알짜기업으로 분류됐지만 1억4천800만달러의 헐값에 매각됐다. 세미니스는 한 달 뒤 업계 2위인 중앙종묘(주)도 흡수해 버렸다.

이어 일본의 다키이, 네덜란드의 누넴 등 외국 종자회사들이 줄줄이 진출, 국내 종자시장은 사실상 다국적 기업들의 무대가 되면서 국내 종자들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농수산식품부 송지숙 사무관은 "국내 채소종자 시장은 1980~90년대 급속한 성장을 했지만 외환위기를 전후해 외국기업에 잠식됐다"며 "외국기업의 진출로 기술적인 향상이 있었던 반면 국내 유전자원과 육종기술의 유출 등 부작용도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