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으로 이전하는 미군에게 삶의 터전을 내줘야 했던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했고, 전국의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도 대추리에 집결해 주민들 편에 섰다.
하지만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저항은 국가 정책, 그것도 초강대국 미국과 맞물린 공권력을 뚫지 못했다.
대추리 사태는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지방자치가 무르익어 가는 21세기에 벌어졌다.
하물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50여년 전 그 때는 어땠을까. 당시 미군기지에 땅을 내줘야했던 이들에게는 더욱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영기(66·동두천시 동두천동)씨 역시 그랬다. 캠프 케이시가 들어서기 전 이씨가 살던 양지말에서는 1천여가구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어느 날 갑자기 미군부대가 들어온다며 무조건 나가라고 해 쫓겨났고, 여전히 눈 앞에 고향을 두고도 못가는 실향민 아닌 실향민으로 살고 있다.
이씨는 "한많은 동두천은 미군기지 조성으로 인해 최초로 징발당한 지역"이라며 "어린시절 부모님과 살던,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리는 고향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이씨에 따르면 미군에게 쫓겨난 주민들은 이곳저곳 떠돌며 소작일을 하다 한 명 두 명 세상을 등졌다.
현재는 양지말 옛 주민 10여명만이 동두천동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나마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1980년에 국방부가 현 권총사격장 일대 논밭 등 3만여㎡를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라고 했지만 끝까지 거절했다"며 "결국 토지사용승낙서에 서명을 하고 빌려줬어도 지금까지 근 20년간 토지사용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군기지에 강제징발당한 땅 되찾기 운동을 벌인 동두천시민연대 사무실에는 원소유주들이 보낸 한많은 사연이 쌓여있다. 그 중에는 '집에 불을 지르고 총을 쏴대서 나오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는 이모씨의 충격적인 증언도 포함된다.
미군에 내준 땅 면적은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군사용도로 사용이 끝나면 되돌려 준다"는 징발담당관들의 약속이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진행된 숱한 소송과 진정 등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지켜질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고 있다.
2006년 3월 제정된 주한미군공여구역주변지역등지원특별법은 원소유주나 아직까지 사유지를 가진 이들의 권리찾기를 원천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경기도내 몇몇 로펌에서는 미군기지를 위해 국방부가 실시한 강제징발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정보가 독점되던 시기에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도 승소한 사례가 거의 없었지만 이제 시대가 변해 다툼의 여지는 충분한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A로펌 관계자는 "징발당해 소유권을 넘겨야 했던 원소유주들이나 아직도 소유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50년 넘게 국가안보를 위해 희생해 온 피해자인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