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미군기지로 인한 주민들의 재산피해는 비단 위기상황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까이는 대추리로 대표되는 평택에서 그랬고, 앞으로 무건리훈련장 확장을 앞둔 파주에서도 양상은 비슷하다. 기지조성 방법이 주민들의 토지 '징발'에서 '수용'으로 바뀐 것이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1963년 7월 6일자 조선일보에는 '징발토지(徵發土地) 보상요구 동두천 400 주민 시위'라는 짧은 기사가 실렸다. 40여년 전에도 국가에게 권리를 침해당한 주민들의 울분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963년은 미군기지가 10여년간 무단점유한 사유지를 합법화하기 위해 정부가 징발법을 제정한 그 해다.
지난 1일 평택시 서탄면 진위천 둑길. K-55(오산비행장)가 멀리 바라보이는 곳에서 김연식(75), 임광래(70), 유화식(70)씨가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 했다.
세 명 모두 1952년 오산비행장이 건설되면서 고향에서 쫓겨난 이들. 김씨의 고향은 신야리(현 적봉리)고, 임씨와 유씨는 야리(현 장등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들의 고향은 평택평야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이었고, 대부분의 가옥은 행랑채가 딸린 전통한옥일 정도로 부유한 마을이었다.
미군은 그 마을을 불도저로 순식간에 밀어버렸고, 집 대신 주민들에게 달랑 군용 천막 7개를 내줬다.
임씨는 "우리 논 약 10만㎡가 오산비행장 활주로 아래 깔렸다"며 "당시는 공포분위기였다. 목숨이 붙어있는 것이 다행인 시대였다"고 담담히 말했다.
미군에 삶의 터전을 내준 뒤 고향을 그리워한 주민들은 '야리친목회'를 조직,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1년에 최소 한차례씩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몇년전 주민들은 옛기억을 더듬어가며 꿈에 그리던 고향 그림 한 장을 완성했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고향을 기억하고, 후대에 알리기 위해서다.임씨는 "지금도 꿈을 꾸면 고향꿈만 꾼다. 시간이 날 때면 이곳에 와서 미군기지로 변한 고향을 바라본다"고 말했다.
지난 50년간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고, 국제정세도 빠르게 변했다.
그래도 미군 주둔으로 마구 엉켜버린 '실타래'는 풀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여전히 앞으로만 굴러가고 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국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우리들이 애국자 아닌가. 우리마저 죽고 나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사라져버릴까 두렵다."
진위천 건너 손에 잡힐 듯 가깝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고향을 응시하던 유씨가 낮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