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영환(문화체육부장)
설이 설 같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 불황이 명절 풍속도마저 바꿔 놓았나 보다. 설이 두렵다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에는 시댁이나 큰 집에 내려가 '가사 노동'을 해야 할 며느리도 있겠고, 또 '결혼 타령'을 들어야 할 노처녀, 노총각도 있을 것이다. 이쯤이면 '명절 증후군'이란 단어도 낯설지 않고, 한 결혼정보업체의 설문조사에서 혼기 놓친 여성과 남성이 명절에 가장 듣기 싫은 소리로 '결혼 언제 하느냐'를 꼽는 것을 보면 이들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한편으론 이해된다. 다른 차원의 설 두려움도 있다.

설 자금 확보는커녕 당장 공장이나 가게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놓인 중소기업주나 자영업자들에겐 설은 두려움이 아니라 압박이다. 여린 마음에 설이 두려운 '청년 백수'와 '예비 백수' 대학생을 생각하면 안쓰럽다. 20대 절반이 백수인 '이태백' 상황에서 취업을 못했다고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교육비, 연 등록금만 1천만원이 넘는 상황에서 백수나 예비 백수는 부모와 가족, 친지를 볼 면목이 없을 거다. 이런 와중에서 경기·인천지역 대학들의 막판 등록금 동결 선언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러니까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대학들의 잇단 등록금 동결 선언에도 꿈쩍 않던 아주대, 단국대, 경기대 등 지역 주요대학들이 설을 앞두고 등록금 동결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이들에겐 일찌감치 등록금 동결을 선언한 몇몇 지역대학들이 오히려 눈엣가시였다. 등록금 동결로 인한 예산 절감의 어려움과 대학도 고통 분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대외 명분 사이에서 지역대학들은 후자를 택한 셈이다. 아직 대학들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을 수 없다. 자칫 등록금 동결이 학생 장학금 수혜 축소 등 학생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들이 등록금 동결 선언 이후 실제 비상 경영체제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허튼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등록금 동결이 대학에 따라서는 최소 30억원에서 최대 100억원의 재정 감소 요인이 발생하는 만큼 학교측으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다. 등록금 동결이 교직원들의 인건비 동결과 경상비 절감이란 현실로 다가왔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교육시설은 개·보수를 중단하고 신규 교수채용도 중단해야 할 판이다. 재원이 부족한 대학은 사학진흥재단 장기 저리 융자를 노크하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 또 있다. 경희대, 아주대는 학부 장학금은 오히려 늘리고, 가계 곤란자에 지급하는 장학예산을 책정했다고 한다. 경원대와 단국대, 가천의과학대도 장학금과 교수 연구비, 신규교수채용 등 당초 예정된 교육과 연구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기로 했다. 등록금은 동결하되 교육환경 개선은 계속하겠다는 뜻이다. 꼭 지켜지기를 바랄 뿐이다. 물리학 박사가 구청 환경미화원 시험에 낙방하고, 품행이 단정했던 법대출신 한 고시준비생이 취업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서 보듯 대학은 미래의 보증수표가 아니다.

물리학 박사의 미화원 낙방 이유가 지식보단 체력이었고, 고시생에겐 대학공부는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제 대학들은 등록금 동결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사회 현실에 맞게 교과 과정을 조정하고, 졸업생이라도 필요하면 리콜(?)해 재교육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결코 학력 인플레를 조장해서는 안된다. 기업들이 자사가 생산한 제품에 하자가 있거나 인기가 없으면 리콜이나 디자인 변경을 통해 고객에게 다가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금융위기가 극심한 경기침체로 이어지는 시국에서 실업이 어디 특정 연령, 계층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 대학의 변신과 개혁은 어느 조직 보다 절실하다. 학자금을 융자받은 부모와 자녀가 신용 불량자가 되고, 이로 인해 취업시 또다른 불이익을 받는 현실은 사라져야 한다.

주부들과 혼기를 놓친 사람들의 설 명절 스트레스는 애교로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숨 짓는 청년 실업자와 대학생, 망망대해에 홀로선 중소기업주, 자영업자, 영세 근로자들을 생각하면 설 같지 않은 설이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대목 재래시장과 백화점의 썰렁함이 우리시대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지역 대학들도 등록금 동결 선언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대한 양질의 서비스 확충 방안을 계속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