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 과잉과 재고 누적으로 올 수확기 쌀값 폭락이 우려되는 등 국내 쌀
산업이 작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1차적 원인은 정부의 쌀정책기능 약화
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현재 농림부에는 식량정책국이 없고 식량생산국만 있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정부조직 개편으로 식량정책국이 농산국과 통합돼
식량생산국이 되면서 21명으로 구성된 식량정책과가 쌀정책을 전담하고 있
다.
 우리나라 양정(糧政) 조직은 쌀이 갖는 중요성에 따라 그동안 부침을 거
듭해왔으나 지금의 조직이 가장 취약하다.
 지난 1948년 정부 출범 당시에는 양정국으로 출발했다.
 양정국은 식량증산을 위해 녹색혁명을 부르짖던 60·70년대는 물론 쌀 수
입이 본격화된 80년대까지 농림부내에서 이른바 노른자위 부서였다.
 당시에는 농림부가 쌀 수매, 도정, 보관, 수송 등에 대한 전권을 갖고 도
·소매가격 결정은 물론 농민의 손에서 소비자의 손에 이르는 전과정을 쥐
고 흔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농림부 양정국장은 재무부 이재국장, 내무부 치안국장과 함께 정부
부처 3대 요직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농림부의 양정조직은 새마을 운동과 식량자급 운
동이 본격화되던 73년 양정국이 식량국과 양곡관리국으로 나뉘어 2개국 6개
과로 확대 개편되고 식량차관보라는 직제가 신설되면서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쌀산업이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차츰 떨어
지면서 양정조직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발점이었던 81년에는 식량국과 양곡관리국을 담당하는 식량차관보 자리
가 폐지되고 두 국(局)은 60·70년대의 양정국보다 훨씬 권한이 축소된 양
정국으로 통합됐다. 외형은 원래 모양새로 되돌아갔지만 힘은 훨씬 약해진
셈이다.
 그후 김영삼 정부때인 94년 양정국은 식량정책심의관실로 바뀌면서 3개과
로 축소됐고 96년에는 지방자치단체에 있던 양특회계 공무원 979명마저 지
방직 공무원으로 전환됐다.
 식량정책심의관실은 98년 식량정책국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고 급기야
99년 5월 단행된 정부조직 개편으로 식량생산국내 식량정책과로 축소돼 간
신히 양정조직의 명백을 유지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독립 외청인 '식량청' 산하에 36개 식량사무소와 11개
식량분사무소, 200여개 분소로 양정조직이 짜여져 근무 인원이 1만명에 달
하고 중국도 우리나라의 청에 해당하는 '국가양식국'에서 식량정책을 관장
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여러 차례 정부조직 개편 과정을 거치면서 쌀 정책기
능이 지나치게 축소됐다”면서 “낮은 식량자급도로 식량안보가 중요한 우
리나라에서는 식량을 다루는 정책기능이 보다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
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