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석 (경제부장)
[경인일보=]조선건국 초기인 611년 전 도성 한복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졌다. 1398년(태조 7년) 8월 하순 이방원(태종) 등은 계비 신덕왕후 소생인 막내 방석을 후계자로 책봉한 데다 왕실 권력 기반인 사병혁파로 수세에 몰리자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신(儒臣)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남은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을 살해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특히 정몽주를 비롯한 개국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왕대비 안씨를 협박해 공양왕을 폐위케 하는 등 조선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이방원은 이후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1400년 1월 세자의 지위를 놓고 형인 방간과 또다시 무력충돌에서 승리하며 제2차 왕자의 난까지 평정했다. 두 차례 왕자의 난에서 승리를 거두며 지위가 확고해진 이방원은 마침내 세제로 책봉되고 같은 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太宗)이 되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왕자들간의 싸움은 고대로부터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판 왕자의 난은 권력이 아닌 '쩐(錢)의 전쟁'으로 불린다. 패기와 지성으로 뭉친 창업자들이 분골쇄신으로 키운 공룡기업집단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진통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유산 분배를 놓고 벌이는 재벌 2세들간 골육상잔을 보면 눈살마저 찌푸려진다. 지난 2000년 초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후계자로 5남인 정몽헌 회장을 지명함으로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장남이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인 2남 정몽구 회장에게는 자동차 관련 계열사에만 전념하라고 지시하고 사실상의 대권을 5남에게 주었다. 몽헌 회장이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남북경협에서 상당부분 점수를 얻었기 때문이다.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MH(정몽헌)를 현대그룹 단독 회장으로 한다고 발표하자 정몽구(MK) 회장 측은 이틀 후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사인이 들어간 문서를 근거로 MK가 그룹 공동회장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즉각 MH 측이 사실을 부인하고 MK 측이 다시 반박하는 등 형제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왕회장 권위 앞에서 MK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어 왕자의 난은 끝났다. 이래서 현대계열사는 정몽구 회장쪽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과 정몽헌 회장쪽의 현대건설,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 등의 그룹으로 재편됐다.

지난 2005년엔 두산그룹 형제들이 막가파식 상호 비방폭로전에다 검찰 진정서 제출 등 재벌 2세의 재산싸움 진수를 드러냈다. 박용오 회장은 "용성 용만 형제가 위장계열사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고 위장계열사를 통해 외화를 해외로 밀반출하는 등 자신들의 비리가 드러나자 나를 두산산업개발회장에서 축출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반해 박용성 회장 측은 "두산산업개발 지분매입은 경영권 탈취시도"라면서 "경영권 탈취는 선대회장의 유훈인 공동소유 공동경영의 원칙을 위반한 행위"라며 그룹에서 제외시켰다. 지난 7월 말엔 금호아시아나 그룹의 박삼구 박찬구 회장이 동반 퇴진하는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동생인 찬구 회장이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늘려가자 박삼구 회장은 "형제들이 계열사에 대해 균등 출자하고 결속했지만 동생이 가족간 합의를 위반해 정상적 경영에 지장을 초래했다"며 동생을 해임했다. 이들 그룹처럼 앞에선 기업이윤의 사회공헌을 외치며 뒤로는 '쩐'을 좇아 형제간에 법정다툼을 벌이는 2세들이 수두룩하다. 권력과 재산은 분배가 어렵고 독점욕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국민들이 재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성장 및 세습과정에서 투명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국민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는 사회공헌과 유산다툼으로 오히려 국민들이 재벌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투명한 상속과 윤리경영을 통해 국민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재벌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우리 국민들은 언제까지 신문 사회면에 평생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쾌척했다는 김밥행상 할머니들의 미담기사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