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표 (정치부장)
[경인일보=]북반구에 한파와 폭설이 이어지고, 남반구에는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이상 기후가 지구촌을 뒤덮고 있다.

유럽에서는 영하 30도를 밑도는 한파가 몰아쳐 80명 넘게 숨졌고, 눈을 보기 힘들다는 베이징에는 10㎝가 넘는 눈이 쌓였다. 미국의 남부 휴양지인 마이애미에서는 영하의 추위와 폭설로 7명이 숨졌다.

한반도도 이상하다.

한파와 폭설이 뒤엉켜 전국이 설설 기고 있다. 6일 철원의 아침기온은 영하 26.8도까지 떨어졌다. 9년전 기록을 갈아치운 강추위다. 지난 4일 25.8㎝의 눈이 내린 서울은 기상관측 이래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수원의 19.5㎝는 역대 3번째로 많은 양이다.

경부고속도로 서울 달래내 고개~성남 구간이 3시간 이상 멈춰서는 최악의 교통대란으로 새해 첫 출근 길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용인 동백에서 오전 8시30분에 출발한 회사원은 오후 2시가 넘어서야 수원 팔달구 인계동 회사에 도착했다. 좀 멀다 싶으면 출근을 접어야만 했던 수도권의 기능 마비는 재난대응체계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기상청은 눈구름이 갑자기 커져 예보가 빗나갔다고 하고, 정부와 지자체는 워낙 많이 내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시민들은 눈 치우라고 이웃끼리 주먹다짐을 하고 차를 도로에 팽개치고 가버렸다. 대한민국 수도(首都)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기상청은 눈이 내리고 나서야 중계방송을 했다. 예고편에서는 2~7㎝가 올 것이라고 하더니 10㎝가 넘게 쌓이자 대설경보를 내리는 뒷북을 쳤다. 구름의 양이 예상외로 커지는 바람에 예측하기가 어려운, 드문 경우였다고 해명했다. 늘 들었던 재탕에 삼탕 재방송이다. 눈 폭탄 대란의 이면에는 기상청의 한심한 무능력이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정부와 지자체도 한계를 드러냈다.

눈이 쌓인 뒤 염화칼슘을 뿌려대고, 많이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제설차가 등장하는 고질은 여전했다. 강화도에 설치된 CCTV를 지켜보다 '아, 이제 서울에도 눈이 제법 내리겠구나'하며 장비 챙겨 나서는 게 제설대책의 실상이다. 경기도와 시·군 사정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04년 모스크바에는 50㎝의 폭설이 내렸지만 출퇴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동시에 제설이 이뤄지고, 쌓일만 하면 차로 퍼나르니 도로에 눈이 깔릴 틈이 없는 것이다.

유럽과 이웃 일본은 눈이 내릴때의 초기 대응과 제설 요령이 시스템화 돼 늘 같은 매뉴얼로 작동된다. 집 주인은 눈이 내리면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알아서 치워 버린다. 눈길에 행인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돈으로 배상해야 하는 게 그들의 룰이다.

20세기를 호령한 미국이 새천년들어 체면을 구긴 건 속수무책 테러에 당한 9·11이 아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자존심이 한방에 무너진건 2005년 허리케인 카타리나일 것이다.

뉴올리언즈의 시가지가 통째로 물에 잠기고 사체들이 둥둥 떠다니는 참담한 장면에 미국은 망연자실했다. 허리케인이 뻔히 오는데 주정부와 연방정부는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지구촌은 9·11때 놀랍도록 침착했던 미국인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인명을 해치는 야만성에 한번 더 놀랐다. 이게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이라니.

환경변화에 따른 기상이변은 더 빈번하게, 그리고 더 포악한 모습으로 한반도를 괴롭힐 것이다.

자연재해는 사후 수습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 다시 추스르고, 다시 정비해야 한다. 국민 의식의 수준도 한 단계 더 올라서야 한다. 눈에 파묻혀 오도가도 못하는 한심한 모습으로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새해 폭설과 한파는 대한민국 재난방지 시스템의 수준을 가늠해 보는 전화위복의 기회일 수 있다. 내년 겨울에도 눈 때문에 출근을 못하는 지경이라면 정부와 지자체가 국민 폭동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