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대륙 양쪽 끝에 위치한 한국과 유럽은 지리적 거리가 멀다. 그동안 정치적, 외교적으로도 상대적으로 `머나먼 이웃'이었던 양 측이 서로 시장을 개방하자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2007년 5월 시작했다. 2년 반 만인 작년 10월 마침내 협정문에 가서명했다.

   한국과 유럽연합(EU) 양 측은 1분기 정식서명을 목표로 세웠고, 의회 비준동의라는 절차를 기다리는 상태다.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올 하반기에 FTA가 발효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적으로 두 이웃 간의 '정서적' 거리가 한층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영문본 협정문을 21개 언어로 번역하는 EU의 작업이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다. 브뤼셀 외교가에선 3~4월께 정식서명을 하고 의회 비준동의를 거쳐 10월께 협정을 발효시킬 '시간표'를 그리고 있다. EU 쪽에선 특별한 정치적 변수가 없지만, 우리의 경우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FTA 비준동의안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여름 휴회기 이후에야 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이 처리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 보호주의 경향이 고개를 드는 상황에서 국제무역의 핵심 '플레이어'인 한국과 EU가 FTA를 체결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아니라 국제 정치, 외교적으로도 큰 함의가 있다.

   작년 1~10월 실적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한국의 대(對) EU 수출액은 382억달러, EU로부터의 수입액은 259억달러다. EU는 총 교역액 641억달러의, 우리에게는 중국에 이은 제2의 교역 파트너다. 또 EU가 1962년부터 작년 9월까지 누적 외국인직접투자(FDI)액에서 551억달러를 기록하며 대(對) 한국 최대 투자자라는 점에서 최적의 FTA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EU 입장에서 한국은 제8대 역외 교역 상대이자 유라시아대륙 반대편의 '신흥국'이었으나 이젠 주요 선진 20개국(G20)에 이름을 올린 전략적 동반자이며 잠재력이 매우 큰, 꼭 개척해야 할 시장이 됐다.

   기대처럼 올 하반기 협정이 발효되면 우리 위상이 높아지고 경제를 더 도약시킬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정부와 업계는 5억명, 국내총생산(GDP) 18조달러의 세계 최대 시장을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유럽 기업에 맞서 어떻게 국내 시장을 지켜야 할지 아이디어를 짜내야만 한다.

   FTA 발효 이후 5년 이내에 공산품과 농산물 전체에 대한 관세가 철폐되면 우리 기업은 크게는 20%에서 작게는 2~4%의 가격경쟁력을 보탤 수 있다. 종전의 품질 수준을 유지하고 브랜드 인지도 제고 등에 노력한다면 관세 철폐에 따른 가격경쟁력 등 덕에 국산 공산품 및 농산물 수요가 EU 시장에서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세계적 대기업들이 즐비하고, 작지만 강한 중소기업들이 무수히 많은 유럽 역시 FTA효과를 무기 삼아 전방위적 공세를 펼 수 있게 된다. 거대 제약.화학 기업들과 필립스 등 전자.의료기 업체를 필두로 화장품.명품업계, 양조.축산업체들에 이르기까지 '높은 명성'에 관세인하에 따른 가격경쟁력도 강화되는 덕을 볼 것으로 기대하며 전략을 짜고 있다.

   FTA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국내 산업으로는 전량 국내 생산하는데다 수출액이 가장 큰 유화가 꼽힌다. 자동차 및 부품업도 최대 수혜주 중 하나다. `한국대표선수'인 전기.전자의 경우 FTA 효과에 대해 "글쎄"라는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 주요 제품의 관세가 매우 낮거나 이미 무관세이며, 대기업의 경우 오래 전부터 EU 역내에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등 현지화가 상당히 정착된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상용 LG전자 헝가리 판매법인장은 "휴대전화는 한국에서 들여오지만 이미 무관세고 TV도 관세인하 혜택이 크지 않다"라고 밝혔다. 이 법인장은 그러나 "서유럽 선진국에서 팔리는 프리미엄 제품인 양문형 냉장고 같은 제품들은 한국에서 직수출하기 때문에 관세인하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 영국법인의 신현석 최고재무관리자(CFO)는 "현지생산체제를 갖춘 대기업들은 FTA 발효로 인해 큰 혜택을 기대하지 않으나 한국에서 EU지역으로 직수출하는 중소기업의 경우 TV나 위성방송수신기, 전자부품과 소형 가전 등의 분야에서 가격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록 완제품에 대한 관세인하 혜택이 미미한 경우라도 부품과 재료 조달 방식의 최적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되는 등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전략ㆍ전술에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아울러 한국에 생산 기반을 둔 유망 중소기업들로선 가격경쟁력이 높아지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어서 품질 유지노력과 업계 공동 물류.마케팅, 정부의 적절한 지원책 등이 뒤따르면 FTA 효과를 톡톡히 누릴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기아자동차 슬로바키아 공장의 배인규 부사장(공장장)은 "우리 공장의 경우 금액 기준으로 총 재료비의 30~40%에 해당하는 부품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어 관세 철폐의 효과를 배제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배 부사장은 또 "EU가 한국뿐 아니라 다른 제3국과도 FTA를 맺게 될텐데 그러면 다른 EU의 FTA 파트너 국가에 완성차를 수출할 때 한국에서 들여오는 게 아니라 슬로바키아(기아), 체코(현대)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수출하면 가격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일부 종목에 수출이 집중된 우리와 달리 다양한 분야에 걸쳐 크고 작은 기업들이 뛰고 있는 EU로선 국가와 업종, 기업별로 이해와 전망이 엇갈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차 산업인 농ㆍ축산업과 3차 산업인 은행, 법률 등 서비스 산업의 대 한국 진출이 확대되는 것을 반기고 있다. 관세환급과 원산지규정으로 딴죽을 걸며 한-EU FTA 체결에 강하게 반발하는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도 협정 비준동의를 저지하기 위해 로비에 나서면서도 한국시장 진출전략을 새로 짜는 등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와 통상 관계자들은 한-EU FTA는 '동전의 양면'과 마찬가지며, 우리에게 기회인 동시에 위기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기업들이 "시장이 개방됐다", "관세가 철폐됐다"라는 단순한 사고에 매몰된 나머지 전략적 접근을 등한시한다면 낭패를 볼 우려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또 관세ㆍ비관세 혜택이 대상이 되는 제품인지를 판별하는 원산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징벌적 조처를 당하게 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코트라의 정철 브뤼셀 무역관장은 당부했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만 EU는 이에 대한 감시를 강화할 게 자명해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양 측이 1천500만SDR(약 220억원) 이상의 민자사업을 개방하기로 한 만큼 제품을 내다 파는 데에만 전념하지 말고 1조5천억유로 상당의 EU 조달시장을 공략하는 데도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각별한 우려를 자아내는 점은 FTA 시대에조차 우리 기업이 혹시라도 "현지 딜러나 브로커를 통해 물건만 팔면 그만"이라는 구태의연한 생각에 함몰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27개 회원국이 연합체를 이룬 EU 내부의 정책 동향, 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EU 시장이 '그림의 떡'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EU FTA 시대에는 생산과 판매의 현지화 뿐 아니라 경영전략의 현지화까지 요구된다는 것이 유럽진출에 한 발 앞서 있는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박준우 주(駐) 벨기에ㆍEU 대사도 "한-EU FTA가 우리 기업들에 엄청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지 상황을 '귀동냥'으로만 파악하려는 소극적 자세를 견지한다면 유럽이라는 거대 시장이 가져다 줄 무한한 잠재력이 반감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