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인수 (지역사회부장)
[경인일보=]선거는 무능을 악순환시키는 도구인가. 물론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된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선거는 국민이 스스로 주권자임을 확신하고, 위정자에겐 권력이 민의의 소산임을 각성시키는 엄숙한 의식이다. 선거는 국민 심판이다. 국민으로부터 양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고, 권력을 연장시키거나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한다.

심판의 기준은 오로지 주권자의 이익이다. 즉 주권자의 이익 실현에 능력을 발휘한 권력은 살아남고, 무능력한 권력은 도태된다. 따라서 선거의 기준은 능력있음, 즉 유능함이다.

문제는 유능을 재는 기준이 무능인데 있다. 우리의 역대 선거는 정당이나 인물이 보유한 능력의 가치를 비교하기 보다는 무능의 경연장에서 덜 무능한 정당이나 인물을 선택하기 일쑤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내내 BBK 악몽에서 헤매다 당선됐다.

이 대통령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노무현 정권의 무능과 무기력 덕분이었다. 짙은 의혹에 갇힌 그를 역대 최다표 차이로 당선시킨 동력은 노무현 정권을 향한 총체적 불신이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뿐 아니다. 앞서 김대중 대통령은 비록 DJP연합의 힘이 위력을 발휘했다지만, 정작은 김영삼 정권의 무능을 딛고 일어섰다. 노무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행정수도 이전으로 재미를 봤다지만, 역시 그의 정권 창출 동력은 의회권력을 장악한 거대야당의 무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명박, 김대중, 노무현이 능력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모두 한가락 하던 시대의 총아들이었다. 김영삼도 역사에 새길만한 업적이 적지 않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을 선출했던 역대 대선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벌인 경쟁이 모두 상대의 무능을 까발리는데 있었고, 결과적으로 상대의 무능을 딛고 일어섰으며, 스스로의 무능으로 상대의 집권을 도운 결과를 낳았다. 무능한 정권이 무능한 야당의 집권을 도운 셈이다. 그들은 서로 원수처럼 대하지만, 피차 서로에게 숙명적인 존재의 근거라 할 수 있다. 무능을 매개로 해서 말이다.

이같은 양상이 중앙정치에 국한된 것이라면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지방정치라고 다르지 않다.

역대 단체장중에 비리혐의로 사법처리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른다. 이런 지방의원들은 1천명에 달한다. 지방선거가 범죄의 악순환의 시발점으로 전락한 것이다.

왜 이리 된 것일까. 지방선거가 단체장이나 지방의원 후보들이 보유한 능력의 크기를 재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인물의 능력보다는 정당·지역·학력·경력 기준으로 선출하다 보니, 후보자들은 출발부터 지역에 봉사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중앙당에 충성하게 된다.

중앙당의 지목을 받으려니 자신의 능력보다는 경쟁자의 약점과 비리를 까발리는 경쟁이 치열해진다. 여야 공천을 받은 상당수 후보들은 이미 공천경쟁에서 험악한 네거티브 공세에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니 비정상적인 수단도 동원된다. 바로 돈이다. 양산시장의 비극을 불러온 바로 그 돈 말이다. 단체장과 지방의원의 비리규모만 보면 지방자치 역시 무능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6·2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각 지자체에서 마타도어가 난무한다. 유령처럼 떠도는 말들이 모두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한 사람도 뽑아서는 안 될 사람들이다.

무능한 사람들이 판치는 경연장이 혼란해 유권자는 짜증이 난다. 하지만 선거가 무능을 악순환시키는 도구로 전락한 마당에, 짜증을 내며 외면하는 것으로 자위할 일이 아니다. 정치권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격조와 품위있는 정치를 소원한다면 이번 지방선거부터라도 무능의 악순환을 끊어내겠다는 단호한 결심으로 남은 4개월 동안 옥석을 가리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