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정식 (사회부장)
[경인일보=왕정식기자]수년전 미국의 IRE(Investigative Reporter and Editor) 콘퍼런스에 참석해 미국 언론의 탐사보도 취재방법과 방향등에 대해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콘퍼런스에는 미국 전역에서 온 기자들이 CAR(Computer Assisted Reporting)기법을 사용해 취재보도한 자신들의 기사를 소개했고 이들의 취재기법을 벤치마킹하러 온 외국 기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다니며 들은 내용중 지금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 있는 보도가 하나 있다.

아동성폭행범들의 현 거주지를 컴퓨터 맵핑기법을 이용, 지도에 표시한 결과 이들이 아이들이 많은 유치원이나 학교 등지에 몰려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기사였다. 기자는 이 보도로 당시 지역사회가 발칵 뒤집혀 주민들이 당국에 대책을 요구하는 등 성폭행범들에 대한 불안이 극심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를 이용해 아동성폭행범들의 주소지를 지도에 입력, 숨겨진 진실을 밝혀낸 취재 기법에 놀랐고, 아동들 주변에 일명 '프레데터'들이 몰려산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다. 순간 무릎을 쳤다. 그 당시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꼭 국내에서 이 기법을 이용해 취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과연 성범죄자의 신상자료를 국내에서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역시나 국내의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우선 아동성폭행범의 주소지와 인적사항을 구할 길이 없었다. 경찰의 협조를 구해봤지만 인권보호차원에서 공개가 불가능하다는 답만 들었을 뿐이다. 결국 취재를 접어야 했다.

그런데 최근 부산여중생 성폭행살인범 김길태사건을 보면서 그 당시 보도에 나왔던 한 미국인의 인터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이웃에 사는 성폭행전력자의 이주를 요구하며 다른 이웃들과 함께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안전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그의 말은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어린아이의 삶을 무참히 짓밟은 이들의 인권을 위해 언제 먹잇감이 될지도 모르는 주변인의 권리(안전)는 무시해도 되는 것이냐는 취지의 주장이다.

맞다! 지금도 우리사회에는 제2, 제3의 김길태가 될 수도 있는 성폭행전력자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활보하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 하루아침에 돌변해 우리의 어린자녀들을 노릴지 모르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렇다면 부모와 사회가 그들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런데도 정부는 성폭행범들에 대한 신상공개에 매우 소극적이다. 현재 정부는 '성범죄자 알림e(www.sexoffender.go.kr)'사이트와 관할 경찰서 등을 통해 이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공개대상도 극소수인데다 열람권자도 극히 제한돼 사실상 무용지물에 가깝다는 비판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주별로 성범죄전력자의 신상정보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모바일기기에서 활용할수 있는 애플리케이션까지 나왔다고 한다. 휴대전화로 성범죄자의 인상착의와 사진, 범죄내용, 거주지까지 알 수 있다고 하니 우리의 경우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특히나 인권이라면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미국사회에서 이처럼 성폭력범죄자에 대해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것은 이들의 인권보다 피해를 당할 수 있는 대다수 시민과 아이들의 인권을 우선시 해서가 아닐까. 성폭행범의 인권보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생명권이고, 성폭행범이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안전이다.

잠시 이런 생각도 해본다. 국내에서 성폭행범들에 대한 신상공개가 미국처럼 활발하게 이뤄졌었다면 이유리양이나 혜진 예슬양처럼 우리의 어린 딸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안타까운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