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혼외 자녀를 둔 미혼부는 미혼모 숫자만큼 많아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는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미혼모가 사회의 냉대 속에 아이 양육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안는 사이 대다수 미혼부는 이런 비난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산다.

   이들에게도 아이에 대한 책임이 절반쯤은 있을 텐데, 실제 그만큼 책임을 떠안고 살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혼모들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이유다.

  
◇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미혼부들
미혼모 정숙희(34.가명) 씨는 아이 아빠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는 것도 없고 양육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정씨는 "그 남자는 산타클로스 같아요. 일 년에 몇 번, 자기가 원할 때 와서 아이를 보고는 가버리죠. 그걸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아이를 보러 오는 이 미혼부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돌을 앞둔 딸 지현이를 키우고 있는 이진희(26.가명)씨는 이해심이 넓은 미혼모이지만 자기 딸을 끝까지 외면하는 아이 아빠를 보면 야속하기 그지없다.

   이씨는 "가장 섭섭한 것은 아이를 단 한 번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라며 "나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해도 애는 그 사람도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최형숙 대외정책팀장은 "대부분의 미혼부는 애가 생겼다고 하면 책임을 회피하기 바쁘다"며 "내가 원한 아이가 아니고 네가 선택한 아이니까 네가 책임지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남자 입장에선 '아이를 지우자'는 의사를 밝혔지만 이를 무시한 채 여자가 독단적으로 아이를 낳았으니 여자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한다는 것이다.

   일부 미혼모들은 이런 반응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진희 씨는 "남자친구도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얼마나 당황하였겠느냐"며 "남자의 부담감이 이해는 간다"고 말했다.

  
◇ 고통과 상처에 신음하는 미혼모들
그러나 미혼모 혼자 책임지기에는 아이 양육의 부담이 너무 큰 것이 현실이다.

   최씨는 "한밤중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려면 눈물이 막 쏟아진다"며 "아이 아빠들은 이런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혼모들이 사회적 편견이나 불이익과 싸우는 동안 미혼부들은 여전히 '싱글'의 삶을 살고 있다.

   정숙희 씨는 "남자는 스스로 미혼부라고 밝히는 사람도 없고, 살면서 미혼부냐는 질문도 받지 않으며, 개인사에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며 "여자가 임신한 순간 피해버린 것은 이해한다하더라도 그 후에 여자와 아이의 삶에 대해선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진희 씨도 "아이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말을 걸다가 아이 아빠 얘기를 꺼내면 난처해진다"며 "남자는 겪을 일이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지현이 아빠 역시 이씨가 임신하자 부모님이 반대한다며 중절을 요구했다. 지현이 아빠는 이씨가 임신 5개월이었을 무렵 이후 연락을 끊었다.

   이씨가 최근 양육비 청구 소송을 제기하면서 1년 반 만에 아이 아빠와 법정에서 마주쳤다.

   그는 지금은 직업이 없다며 양육비로 한 달에 30만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 "양육비 의사쯤 돼야 월 50만원"
미혼모들 사이에선 아이 아빠로부터 양육비를 매달 30만원만 받아도 괜찮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양육비조차 주지 않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아빠들이 많다는 얘기다.

   미혼모들은 "우리끼리 모이면 의사쯤 돼야 양육비로 50만원 정도 준다는 얘기를 한다"고 소개했다.

   그래도 아이 아빠가 금액에 상관 없이 꼬박꼬박 양육비를 주는 경우 미혼모들 사이에선 '신사'로 통한다.

   그러나 신사들이 갑자기 야수로 돌변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들 승준이를 키우는 최미연(37.가명) 씨는 출산 6개월 뒤부터 아이 아빠로부터 매달 양육비를 받았다.

   액수도 80만∼90만원에 달해 다른 미혼모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갑자기 아빠가 승준이의 양육권을 요구해 끝내 법적 다툼까지 벌였다.

  
◇ 미혼부 양육비 부담 제도화 시급
미혼모들은 적은 돈이라도 양육비를 받게 되면 많은 도움이 된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돈도 돈이지만 양육비를 받게 되면 아이 입장에서도 아빠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러다 보니 미혼모들로부터는 미혼부의 책임을 제도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금도 미혼부는 법적으로 혼외 자녀에 대한 양육비 지급 의무가 있지만 양육비를 주지 않을 경우 민사소송을 거쳐야 하는 등 절차가 무척 번거롭다.

   외국의 경우 국가가 먼저 양육비를 준 뒤 미혼부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거나 재판 없이 양육비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스웨덴은 18세 미만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부모는 양육비를 지급해야 한다.

   양육비를 받지 못할 땐 정부가 자녀 1인당 최대 월 22만원까지 지급한 뒤 동거하지 않는 부모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

   호주도 종전엔 미혼모가 친부에게 자녀 양육비를 받으려면 재판을 해야 하는 등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그러나 지난 1988년 미혼모들에게 자녀 양육비를 선지급하는 정부기관 '아동지원국(CSA)'을 신설하면서 미혼모들이 소송을 제기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 "양육비 정부가 대신 받아내도록 하자"
미혼모가족협회 목경화 대표는 "우리한테 돌을 던지지 말고 책임감 없는 남자들한테 돌을 던져야 한다"며 미국의 사례를 소개했다.

   목 대표는 "미국엔 보건복지부 산하에 아동지원국(DCS)이란 정부기구가 있어 미혼부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다고 신고하면 DCS가 숨겨놓은 재산까지 추적해 강제로 양육비를 받아낸다"고 말했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혼모와 미혼부는 아이를 가지면서 많이 싸우게 되고 그러다 보니 관계가 망가져 '굶어 죽더라도 아이 아빠한테는 돈을 안 받겠다'는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위원은 따라서 "법원에 맡겨둘 게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엄마를 대신해 아빠로부터 양육비를 받아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혼부의 책임이 확실해지면 남자들도 경각심을 가져 혼외 임신을 막는 예방 효과까지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