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으로부터 최근 입수한 구라치 테쓰기치 (倉知鐵吉.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의 회고록『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연합뉴스)

   한.일 강제병합 당시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倂呑.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 제 것으로 만드는 것)'하면서도 침략적인 의도를 은폐하려고 '병합(倂合)'이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던 사실이 17일 공개됐다.

   또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사건이후 안 의사를 어떻게해서든 사형시키기 위해 중국에서 재판을 받게했고, 이 과정에서 외무성측과 '한국황제의 사주사건'으로 조작해 조기 병합강행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군 및 통감부측간에 내부암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연합뉴스가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으로부터 최근 입수한 구라치 테쓰기치 (倉知鐵吉.한일병합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의 회고록『한국병합의 경위(韓國倂合ノ經緯)』를 통해 통해 드러났다.

   회고록은 일본 '외무성조사부제4과(外務省調査部第四課)'가 1939년(昭和14년11월)에 `비(秘)'문으로 구분해 발간했다. 전문가들은 이 문건이 2010년 6월 일본의 한 서점에서 출판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일본 국회도서관 사이트에 의하면 일본 국회도서관이나 도쿄도립중앙도서관 등 전국 7개 도서관에서 이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돼있다.

   회고록은 "한국을 일본에 합병한다는 의논은 세상에 널리 주장됐지만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며 "마치 회사 합병과 같이 일.한 양국이 대등하게 합동한다는 사고방식도 있고,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같은 연합국적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있었다"고 소개하고 "문자도 '합방(合邦)' '합병(合倂) 등 여러가지로 표기됐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고무라 외상은 한국은 완전히 일본 내에 포함된 것이며 한국과 외국과의 관계도 없어진다는 생각이었다"면서 "'합병'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고 그렇다고 '병탄'이라고 해버리면 침략적이라서 또한 쓸 수 없다"고 술회하고 "여러 고심끝에 나는 지금까지 사용된 일이 없는 '병합'이라는 단어를 안출했다"고 조어(造語) 사실을 공개했다.

   회고록은 "'병합'이면 다른 영토를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는 의미가 '합병'보다도 강하다"며 "그 이후로는 '병합'을 공문서에 사용했으며 맨 처음 사용한 것은 대한(對韓)방침서"라고 밝혔다.

   회고록은 특히 "'병합'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논란이 일어나는건 필연적이었으므로 나는 조용히 이 단어를 사용했고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다"면서 "가쓰라 총리 등은 대한방침서를 읽을 때 가끔 '병합'을 '합병'이라고 읽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과 관련, 회고록은 "조사결과 도쿄에서 일부 사람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대규모가 아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간의 불온 한인 등이 계획해 만주에서 결행한 사건으로 결론지었다"며 "뤼순(旅順) 법정에서 적법하게 사건을 처분하면 충분하다고 인정해, 이제 가능한 한 사건을 조그맣게 취급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그 뜻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관련,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일본 정부는 안의사를 반드시 사형시킨다는 입장이었으나 만일 안의사를 도쿄로 데려가 심리할 경우 당시 사법부의 분위기 하에서는 사형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라며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구라치 정무국장을 만주로 보내 사건을 축소킨 뒤 뤼순 현지에서 처리토록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군과 통감부측은 이번 사건을 조기병합의 명분으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 황제가 사주한 사건으로 조작하려고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강제병합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대표들이 12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강제병합 100년 한일시민대회 기자회견을 통해 강제병합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있다. (연합뉴스)

   회고록은 "한국거주 일부 일본인중에는 이토공 암살을 한국황제가 사주했다고 하고 이를 이유로 단번에 병합을 단행해야 한다며 무리해 증거를 만들려고 했다"며 "한국 주류군 참모장인 아카시 소장이 달려왔고 검사측에서도 나카가와 이치스케 검사장이 오고 한국어가 가능한 통감부 관계자도 왔다"고 밝히고 "이들은 뤼순에 체재하면서 안의사를 감시하며 어떻게든 증거를 만들려고 계책을 꾸미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어 "그러나 나로서는 정부가 병합의 대방침을 결정한 이상 가장 적당한 시기를 고르는 일이 필요하고 무리해 병합을 강행하는 것은 단연 불가하다고 믿었으며 시라니 민정장관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 등도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데 대해 반대했고 단호히 외부압력에 응하지 않았다"고 소개하고 "이토공 암살사건을 이용해 병합을 실행하려고 했던 계획은 끝나고 말았다"고 밝혔다.

   한편,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는 1920년 고마쯔 미도리(小松綠)가 발간한 `조선병합의 이면'이라는 책자에도 일본이 병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배경에 대한 구라치의 진술이 언급돼 있다고 밝혔다.

   한 교수에 따르면 구라치는 1913년 당시 외무성에서 조선통감부에 파견된 고마쯔 미도리에게 `각서'를 전달했고, 고마쯔 미도리는 이를 토대로 1920년 `조선합병의 이면'이라는 책자로 발간하고 책자에 각서도 첨부했다.

   한 교수는 또 1950년 4월 일본에서 발간된 `외교사화 제4집'에도 일본이 병합 용어를 만들어 낸 배경에 대해 구라치가 술(述)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일본이 병탄이라는 용어가 주는 강제성을 은폐하기 위해 병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실이 확인된 것"이라며 "이번 기회에 그동안 잘못 사용돼온 병합이라는 용어를 병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구라치 테쓰기치는 일본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의 외교관으로 조선통감부 서기관을 거쳐 외무성 정무국장으로 재임하면서 한국병합을 위한 외교문서를 준비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