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A급 전범들조차 애초부터 미국에 싸움을 건 태평양전쟁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서로 확인됐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8일 보도했다.

   이 문서는 1958년 이후 일본 법무성이 당시 살아있던 기도 고이치(木戶幸一.1889∼1977) 전 내대신(內大臣) 등 A급 전범 12명으로부터 태평양전쟁 등과 관련한 진술을 들은 것으로, 최근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일본 국립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

   신문에 따르면 시마다 시게타로(嶋田繁太郞.1883∼1976) 전 해군대신은 당시 증언에서 "전쟁에 돌입했을 때부터 전쟁은 확실히 승산이 없었다"며 "'전운(戰運)'이라는 것도 있고, 다년간 맹훈련을 거친 함대의 실력에 기대하기도 했다. 서전(緖戰)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여기서 전과를 올리고 이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종전까지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 기도 전 내대신은 "그 시점에서 전쟁 (확대) 정책을 억누르면 내란이 일어나, 폐하(쇼와 일왕)의 퇴위 문제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고 설명했다.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1877∼1966) 전 육군대신은 "제1차대전과 그 이후 일본의 정치는 총체적으로 건전성을 결여하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국가의 자연스러운 큰 흐름이 전쟁의 길로 들어서는 결과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데 대해 오시마 히로시(大島浩.1886∼1975) 전 주독일 대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독일의 전력을 잘못 봤다"며 "독일의 힘이 저 정도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일본이 삼국동맹을 맺지 말아야 한다는 건 명백했다고 생각한다"고 후회했다.

   한번 전쟁이 확대된 뒤로는 도중에 멈추기는 어려웠다고 입을 모았다.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1892∼1978) 전 내각서기관장은 "돌이켜 생각하면 빨리 전쟁을 중단해야 했지만, 당시엔 '패전'이나 '전쟁 종결'을 입에 올리는 것을 범죄시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하타 순로쿠(畑俊六.1879∼1962) 전 육군대신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중에 각지에서 상당한 불법 행위나 지나친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쟁을 끝내자는 말은 1945년에 들어서야 본격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도 전 내대신은 "1945년 1월 미군이 (필리핀) 링가옌만에 상륙했을 때쯤부터 전황이 더욱 긴박해졌다. 나와 폐하 사이에서도 전쟁 수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며 "도쿄의 방위를 맡은 구주쿠리하마(九十九里浜)에 배치된 사단에도 무기가 없는 상황이었다. 폐하도 이런 상황을 알았기에 종전 결의를 굳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일본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오카 다카즈미(岡敬純.1890∼1973) 전 해군성 군무국장은 "일본의 희생으로 대동아공영권에 속한 나라들이 독립했고, 이로써 대동아전쟁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독립한 나라 중에서 진심으로 일본에 감사하는 나라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단언했다.

   1946년 극동 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된 이들 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사형수 7명과 옥중 병사자 7명을 제외한 이들은 1954∼1956년 3월 모두 풀려났다. 일본은 A급 전범중 숨진 14명을 '쇼와 순난자'로 추어올리며 1978년 10월 야스쿠니(靖國)신사에 몰래 합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