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 1명과 농성자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 형사재판이 20개월간의 험난한 여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작년 1월 참사가 일어난 이후 22개월만이다.

   1,2심 법원에 이어 대법원까지 기소된 농성자 대부분에게 징역 4~5년의 중형을 선고한 것은 사회적 약자라고 해도 불법행위는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 쟁점별 법원의 판단은 = 재판의 최대 쟁점은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있던 망루의 화재 원인이었다.

   1,2심 재판부는 경찰특공대의 증원과 경찰의 채증용 동영상 등을 근거로 화인(火因)을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결론지었고 대법원의 원심과 같이 판단했다.

   화재 당시 망루 안으로는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화재가 망루 바깥에서 발생했거나 화염병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일어났을 수 있다는 피고인측 주장이 끝까지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무리한 진압이 참사를 불렀다는 '경찰 책임론'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서울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인 한강대로변의 건물에 무단 침입해 망루를 설치하고 화염병과 새총으로 행인을 위협하는 위험한 농성을 벌인 농성자들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특공대를 조기 투입한 것은 경찰 지휘부의 정당한 결정이었고 그에 따른 진압도 정당한 공무집행이라고 봤다.

   재판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던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 문제는 사실상 검찰이 공개 요구에 불응하면 재판부가 직권으로 공개할 수 있다는 쪽으로 정리가 됐다.

   하지만 뒤늦게 공개된 검찰의 미공개 수사기록에는 경찰 지휘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듯한 진술이 있었으나, 진압작전을 정당하게 보고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한 재판부의 판단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2심 판결 후 일각에서는 구조적인 사회 모순은 도외시한 채 피해자에게만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는 비판 여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재판부도 사회적 약자인 농성자들이 재개발로 인해 위협받는 생계를 지키기 위해 농성을 벌인 점은 일정 부분 인정했으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명확히 했다.

   ◇ 파행끝 20개월만에 종결 = 용산재판은 시작부터 파행의 연속이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한양석 부장판사) 심리로 작년 3월12일 첫 공판준비기일을 열면서 시작한 1심 재판은 경찰 관련 수사기록 일부를 공개하지 않은 검찰에 유가족과 변호인단이 수사기록 전면 공개를 요구하면서 초반부터 마찰음이 일었다.

   변호인단은 법원이 수사기록 열람ㆍ등사 허용 결정을 내렸음에도 검찰이 1만여 쪽의 기록 가운데 약 3천쪽을 공개하지 않자 담당 검사를 직무유기와 증거은닉 등의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검찰을 제재하지 않은 재판부에 대해 기피신청을 해 재판이 시작 한달여만에 중단됐다.

   법원이 기피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재판은 3개월여 만에 재개됐으나, 이후에도 변호인단의 변론 거부와 방청객들의 법정소란 등으로 파행하다 법정에 채증용 카메라가 설치하고 변호인단이 교체된 뒤에야 겨우 정상화됐다.

   재판부는 그 뒤 1주일에 2차례 공판을 여는 집중심리방식으로 재판을 진행해 작년 10월 피고인들의 구속기간 만료일을 불과 하루 앞두고 1심 선고를 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이광범 부장판사) 심리로 시작된 2심 재판은 재판부가 변호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미공개로 남아있던 수사기록을 직권으로 열람ㆍ등사하게 하면서 다시 한번 파장을 초래했다.

   검찰은 재판부 기피신청과 즉시항고로 맞섰고 이는 법원과 검찰의 조직적인 갈등으로 비화되며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결국 2심 재판부의 재판장이 전보되고 나서야 사태 수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고, 올해 5월 1심과 큰 차이가 없는 2심 판결이 선고되자 피고인들은 상고하고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