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가 독립유공자 후손의 노후 주택을 수리해 주었다는 기사다. 비가 새는 기와지붕을 비닐장판으로 덮어둔 누추한 수리 전의 모습을 기사 속 사진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 집 주인은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100) 할머니다. 서 할머니는 막내딸 이재원(60·여)씨와 이시영 선생의 묘소 옆인 이곳,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
올해 초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 언론은 서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때 서 할머니는 "돈을 사랑했으면 으리으리하게 살았을 것이고, 권력을 사랑했으면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고, 대신 얻은 것은 외로움이었다"고 말했다. '77년째 가난 대물림…최근에야 기초생활수급 혜택받아'라는 제목으로 실렸지만 무관심속에 버려두었나 보다.
성재 이시영 선생이 어떤 집안인가. 사학자 이덕일은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의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삼한갑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들로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가의 후예들이다. 넷째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설득으로 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등 여섯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 북행길에 나서 해방 후 다섯째인 성재 선생만 살아 돌아왔다.
여섯 형제는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12월 40여명의 가족을 모두 이끌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이기며 일경의 눈을 피해 우당 선생이 미리 답사한 남만주로 향했다. 가산을 비밀리에 급히 정리했지만 당시 돈으로 40여만원이었다. 지금 화폐 단위로 600억원이 넘는 액수다. 우당 선생 일가는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을 후원하느라 그 큰 재산을 바닥낸다. 우리가 잘 아는 청산리전투나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운동이 이들 일가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0년까지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독립군만 3천500여명에 달했다.
월남 이상재는 우당 일가의 남만주행을 듣고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데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여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고 했다.
그런데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백세청풍의 모범'을 보인 집안의 후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비가 새는 기와를 장판으로 덮고 기초생활지원금으로 사는 비참함이라니. 할 말을 잃는다.
남만주와 베이징, 상하이, 톈진을 오가며 독립운동하던 우당 이회영 선생과 가족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자금이 떨어져 굶기를 밥먹듯이 하는 곤궁한 생활을 보낸다. 우당 선생은 66세인 1932년 초 겨울 노구에도 침체된 무장독립투쟁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만주로 향하다 다롄에서 밀정의 고발로 검거돼 고문 끝에 감옥에서 순국한다. 그날이 78년 전인 지난 11월 17일이었다. 우당기념사업회는 이날 우당이 남만주로 가기 전에 국내 독립운동기지로 활용하고 결혼식을 올렸던 서울 상동교회에서 조촐한 추모식을 올렸다.
우당 일가와 인천은 강화학파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남만주에서 우당 일가와 함께 풍찬노숙의 독립운동을 한 인물 중에 경재 이건승 선생이 있다.
이건승 선생은 강화학파 최후의 효장인 영재 이건창 선생의 아우다. 영재의 할아버지 이시원과 작은 할아버지 이지원은 병인양요의 치욕을 참지 못해 나란히 자결한 당대의 의인이었다.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은 강화를 답사한 후 비석 하나 변변히 없는 영재의 묘를 보고 인천사람들을 나무랐다. 그리고 경재의 남만주 행적을 복원할 것을 충고했다. 경술국치 100년을 보내며 부끄러움이 앞선다.